백제의 건국신화는 여러 이설들이 전해 그 시조로 제시되는 인물을 기준으로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들의 한가지 공통적 사항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동명이나 동명신화와 관련된 내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동명은 북부여, 고구려 등 부여족 사회에서 시조로 내세우지고 있거니와 백제쪽의 동명과 관련된 자료는 백제에서도 동명을 시조로하는 건국신화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사서에 정리되어 오는 과정에서 변개를 받은 것 같다. 전근대 사서의 동명에 대한 잘못된 정리를 반결하고 동명신화의 재생성 현상을 주목한 연구성과가 발표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에 의하면 백제 역시 동명신화계통의 건국신화로 지적된다. 그러나 김부식 같은 후대의 편사 시, 백제의 시조로 동명이 표방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시조로만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에 확인되는 동명묘는 각각 동명신화에서 성소로 설정된 곳에 위치하며 대대로 제사가 행해졌다. 왕은 동명을 비롯한 주요 신들을 제사하는 대제전의 주제자가 되었고 왕실에서 제사하는 동명묘는 광범한 영역 내의 동명을 제사하는 사당 중 최고의 성소로 자리잡았다.
백제와 고구려 왕족들이 각기 동명을 시조로 표방함은 동명 계승자로서 왕족의 신성한 권위를 상징함이었다.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동명과 다른 의미의 시조, 직접적 왕실의 시조가 달리 존재하였다. 그에 대한 제사는 종묘에서 행해졌으며 동명묘와의 성립 동기와 제례법 및 기능이 달랐다. 백제는 구태를 , 고구려는 태조왕을 왕실의 시조로 내세웠다. 고구려의 종묘나 백제의 구태묘는 왕실집단의 조상숭배에서 기원하였고 국가체제 발달과정에서 정비되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종묘제의 정비는 특히 신왕족과 전왕족의 공식적 지위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계루부 왕실의 종묘가 명실공히 고구려 국가 유일 종묘로 전환되었다. 백제의 경우 국가체제 이행 초기단계 위례의 왕족과 미추홀 전왕족도 종묘를 가질 수 있었으나 국가체제 이행 후 백제 왕실의 종묘와 대등한 위치의 미추홀 종묘를 고구려처럼 격하시키지 못하였다. 이는 백제사회의 부진보다는 국가체제로이 전환 후 왕실이 거듭되는 큰 타격을 받아 세력 성장이 저지된 반면 해외무역 등 대귀족 세력의 분립적 세력기반을 키워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