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문헌사료상에 보이는 왕궁리유적의 변화
Ⅲ. 문헌사료상에 보이는 미륵사와 왕흥사
Ⅳ. 맺음말
요약
금마의 백제유적을 최근 고고학적 성과가 남아있는 사료에 적용하며 새롭게 살펴보았다. 사비성은 진도성이라하고 금마는 가도성으로 비교된다. 금마는 당에 중요한 곳이었고 그런 이유로 금마는 무열왕의 죽음을 상징되기도 한다. 대관사는 왕궁리 유적의 궁성을 파괴하고 세워졌다. 639년 11월 제석사가 불에 탄 이후 16개월만에 제석사를 재건립하고 있었던 무왕이 죽자 의자왕은 제석사 건립을 멈추고 대관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석사 중건이 중단되며 탑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 후 보덕국은 왕궁성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금마지 기록에 따르면 견훤에 의해 현재의 5층석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마지에 의하면 견훤 이후 왕궁리의 다른 국면을 알 수 있다. 제석사의 심초석은 금마지가 편찬된 18세기 중반까지는 조각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왕궁리 발굴 결과를 적용해 성벽은 판축구조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마의 대표적인 유적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최근 왕흥사와 미륵사를 동일 사찰로 파악하면서, 7세기 금마로의 천도를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일연이 왕흥사와 미륵사를 동일사찰로 파악했던 것은 자신이 읽었던 전거를 믿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전거가 잘못되었음을 우선 살펴보았다. 그 결과 7세기 금마로의 천도 역시 무리한 견해로 파악된다. 왕궁리에서 ‘首府{’銘 기와가 발견된 것은 7세기 당시 금마가 백제의 수도를 구성하는 6부중의 하나인 별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마가 ‘假都城’으로 파악되었다면 그것은 660년 당시까지 수도를 구성하는 別部였기 때문일 것이다. (맺음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