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典籍의 實物은 통일신라시대의 佛經 4種이 전해온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의 史書에는 각 시대마다 典籍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우리 先人들이 중국과 접촉한 기록은 紀元前 12세기의 箕子東來說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衛滿朝鮮, 漢四郡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중국의 流亡人들이 중국의 동북방과 韓半島에 들어왔으니 그들의 문화와 함께 典籍들도 들어 왔을 것이다.
高句麗는 小獸林王 2年(372)에 大學을 세웠고 또 佛敎가 들어왔다. 大學의 設立은 그 이전에 많은 典籍이 들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漢籍에는 五經, 三史, 三國志, 晉陽秋 등이 있었고 書體에 관한 기록이 있다. 扄堂을 세워 자제들에게 漢籍을 교육하였고 600년에는 歷史書 ‘留記’를 新集5卷으로 편수하였다. 佛敎는 三論宗이 盛했고 華嚴, 唯識思想, 小乘, 天台, 涅槃宗이 있었으며 日本에 三論을 傳하였으니 이 계통의 佛典이 전래되었다. 百濟는 375년에 高興이 書記를 편찬하였다. 中國史書에는 五經, 子, 史, 道家書와 易林, 式占, 墳史등의 書冊이 있었고 百濟가 講禮博士, 毛詩博士를 求했다는 기록이 있다. 日本에 論語, 千字文을 전했고 五經, 曆, 醫의 博士와 採藥士 등을 보냈다. 佛典은 印度에서 梵本 阿毘曇藏과 五部律文을 들여다 번역하였고 天台宗, 華嚴學, 三論學, 唯識學이 있었다. 新羅는 545년에 居柒夫가 國史를 편찬하였다. 이 무렵에 詩, 書, 禮, 左傳, 老子가 있었고 隋書에는 文字와 甲兵이 중국과 같다고 하였다. 7세기에는 溫湯碑文, 晉祠碑文, 新撰 晉書등이 史書에 올라 있다. 眞德王5년에는 國學의 실무자로 大舍를 두었다. 佛敎는 佛典과 함께 5세기에 이미 들어왔다. 565년에는 釋氏經論 1700여권이 들어왔고 慈藏이 唐에서 돌아올 때 藏經一部를 가지고 와 經卷이 모두 갖추어졌다. 小乘律과 大乘律이 함께 들어왔고 大乘經典, 三論宗, 涅槃宗, 密敎등의 經典이 들어왔다. 統一新羅에 들어와 國學을 세워 周易, 尙書, 毛詩, 禮記, 春秋左氏傳등을 가르쳤다. 686년에는 則天이 吉凶要禮, 文館詞林의 規戒가 되는 50권을 보냈다. 7세기 후반에는 本草甲乙經, 素問 針經, 脈經등을 敎授하였다. 737년경에는 새로 편찬된 老子道德經이 들어왔고 景德王 때에는 天文博士, 漏刻博士, 律令博士를 두었다. 金生은 대표적인 書藝家였다.
이 시대에는 중국에서 번역된 佛經과 論疏가 거의 수입되어 經學을 연구할 수가 있어 많은 論疏가 전한다. 元曉, 義湘, 憬興, 順璟, 義寂, 道證, 太賢, 表員, 審祥 등이 저술을 남기어 日本의 正倉院의 고문서의 기록에 올라 있다.
儒學과 佛敎에 따른 典籍의 수입은 고대의 國家體制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論疏가 지어졌고 釋讀口訣이 발달하였다. 한문의 釋讀法은 삼국시대에 이미 발달하여 삼국통일 前後에는 그 口訣의 吐가 확립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