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좌평 관계기사의 재검토
III. 고이왕대 좌평의 시치
IV. 4~5세기 좌평제의 전개
V. 맺음말 -좌평제의 변화와 관련하여-
요약
左平 관계기사의 검토를 통하여 佐平은 관직적 성격과 관등적 성격을 동시에 가졌는데, 官職으로서의 성격은 6佐平制를 통해서, 官等으로서의 성격은 上․中․下 佐平과 太․大佐平, 職能이 명기되지 않은 佐平의 형식으로 백제 말까지 병존하였음을 알았다. 初期百濟에서는 中國 郡縣과의 접촉, 3세기 중반 이후 西晉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漢代이래의 중국의 제도․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3세기 중반 단계의 백제 사회는 부족적인 틀을 넘어서는 官制의 정비가 요청되고, 그로 인해 佐平이 始置되었던 것이다. 4세기 초반 한반도 내에서 중국 군현이 소멸한 이후 樂浪․帶方系 주민이 유입되면서 백제의 통치체제는 더욱 발달한다. 근초고왕 단계에 이르면 東晉과의 정식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영토상으로도 최대판도를 이룰 정도로 백제국가의 기반이 확대된다. 확대된 국가 기반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佐平에 있어서도 職能의 分化를 가져옴으로써 6佐平制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內臣佐平․內頭佐平․內法佐平․衛士佐平․朝廷佐平․兵官佐平의 6佐平은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관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內臣佐平이 首席佐平으로서 일반서정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내신좌평의 지위는 408년(전지 4) 上佐平制의 실시로 제도화되기에 이른다. 佐平에 임명된 사람들은 대부분 王族이나 王妃族으로서, 王과의 혈연적인 관계가 임명의 1차적인 기준이 되었다. 熊津遷都이후에는 佐平制에도 변화가 초래된다. 佐平이 막강한 권한을 바탕으로 王을 시해할 정도가 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동성왕은 종래의 6佐平制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王族이나 眞氏․解氏 등 구래의 귀족대신 沙氏․燕氏․苩氏 등 신진세력을 佐平職에 임명함으로써 변화를 모색했다. 이는 천도 이후 새로 진출한 지방세력을 중앙정부에 편입시켜 지배세력화하는 방책이기도 했다. 佐平制의 변화는 무녕왕대 이후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좌평명은 행정업무의 세분화에 따른 佐平職의 분화라기보다는 지배귀족들의 신분을 서열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백제 말기에 이르면 관등의 전반적인 상승 현상이 나타나 佐平 관등의 소유자도 더 이상 ‘佐平 六人’으로 한정될 수가 없었으며, 그에 따라 의자왕대에는 王庶子 41인을 佐平에 排授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다수의 佐平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