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 재위600~641)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중원과 동․서원으로 이루어진 삼원 병렬식 가람이다. 서원에 세워져 있던 미륵사지석탑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보수정비를 하던 중 해체과정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리공에서는 금제사리호와 19종 683점의 많은 유물이 나온 가운데 금제사리봉안기와 금제소형판 명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옛 서사도구의 하나인 도자 7점도 같이 확인되었다. 이 명문을 고찰 해 봄으로써 미륵사의 창건 배경과 그 당시의 백제의 서사 문화를 알아볼 수 있음은 물론 백제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료가 되므로 먼저 서체 분석을 해 보기로 하였다.
금제사리봉안기의 서체는 刀子를 오른손에 쥐고 왼손 엄지를 도자에 부쳐서 힘을 주며, 칼날을 자유롭게 하여 필법과 같이 篆刻을 할 때 倣刻 하듯이 등과 같이 금판에 一劃 一劃 정성 들여 ‘쓰듯이 새긴’ 것이다.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은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제사리봉안기의 앞․뒷면에는 모두 193자를 음각으로 새기고, 朱漆을 하였다. 그 중 90자의 필획을 낱자분석해 본 결과 북조의 필획에 가까운 자가 44자, 북조와 남조의 필획이 섞여 있는 자가 11자, 남조의 필획에 가까운 자가 35자에 미치므로 금제사리봉안기의 서체는 이미 남조 해서에 가까이 와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아직 북조 해서의 영향아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금제소형판의 글자는 면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굵은 바늘로 ‘쓰듯이 새긴’ 것으로 보인다. 금제소형판은 금덩이를 두드려 펴서 만든 것으로 세 편의 명문 내용은 “중부에 사는 덕솔지수가 금 일 兩을 시주하였음”, “하부에 사는 비치부와 부모처자도 같이 보시 하였음”이라고 시주한 사람이 기록되어 있다. 특이한 자로 ‘兩’은 직획의 북조체로 남조의 초서 필획법으로 쓰여 있는 특이한 경우라 하겠다.
금제소형판의 23자를 낱자 분석해 본 결과 북조에 가까운 자는 9자 북조와 남조의 필획이 섞여 있는 자는 7자이며 남조의 필획법에 가까운 7자이다. 이는 이미 해서가 통용되었던 7세기 초의 글씨로써 북조체의 해서필획이 많이 남아 있으나, 남조체의 해서필획으로 변모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북조와 남조의 필획이 섞여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금제사리봉안기와 금제소형판의 639년 백제의 서체가 이미 남조의 해서로 많이 변모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그러나 아직 북조의 영향 아래 있음을 알 수 있겠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