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제기
I. '임나일본부'의 제 용례
II. '임나일본부'의 범주
1. 등장 시기
2. 인적 구성
맺음말
요약
‘임나일본부’에 대한 종래 시각의 문제점과 『백제본기』의 사료 비판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용례와 범주를 중심으로 관련 자료에 대한 기초적 문제부터 재검토하였다.
첫째, ‘임나일본부’의 용례는 흠명2년(541)~흠명9년(548)까지로 좁혀진다.
둘째, ‘임나일본부’는 ‘일본부’ 용례가 다수를 차지하고, ‘기관’과 ‘사신’의 의미로 쓰인 것이 함께 보이며, ‘사신’의 의미로‘府’와 ‘臣’이 중복 기술되기도 한다. ‘안라일본부’는 ‘임나일본부’보다 부정적 시각이 강한 표현이고, ‘임나집사’와 짝하여 나오는 ‘일본부집사’는 최고위 인물인 ‘대신’을 제외한 실무 관인의 총칭으로 대개는 ‘일본부’로 약칭된다.
셋째, ‘임나일본부’와 ‘재안라제외신등’은 광의로는 모두 안라에서 활동한 ‘왜신’을 가리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재안라제왜신등’은 ‘임나일본부’가 사라진 이후 안라에 주재한 ‘왜신’의 총칭으로, ‘임나일본부’와는 별개의 존재이다.
넷째, ‘임나일본부’는 제3자적 표현으로서 왜가 아닌 백제가 먼저 기록하였고, 『백제본기』의 ‘임나일본부’ 용례의 ‘부’는 단순히 원자료의 ‘사신’을 의미하는 ‘신’ 혹은 ‘재’를 대치한 것이며, 이후 『백제본기』를 참고한 『일본서기』 편찬 때 ‘부’는 ‘기관’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일본서기』에 ‘부’가 ‘사신’, ‘사신의 중복’, ‘기관’ 등 다양하게 보이는 것은 사료 계통 때문이 아니라 후대 ‘부’로 일괄 개변하는 과정의 오류이다.
다섯째, 흠명대에만 보이는 ‘임나일본부’의 원형은 ‘왜신․왜재․왜사’이고, 안라에 상주하면서 친신라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로 서술하는 것은, 당대 친신라 활동을 후대 백제의 가야부용관과 왜의 번국관으로 평가한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흠명대에 국한되어 나올 뿐 아니라 용어 자체가 율령국가 이후의 인식의 산물로 보이는 등 ‘사실’과 ‘인식’이 혼재한 조어이다. 따라서 ‘부’의 기원이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6세기 전반 남부가야 정세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함께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에 내재한 대 가야 인식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일본서기』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백제본기』 및 ‘원백제본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원백제본기’는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고, 『백제본기』는 편찬 주체 및 시기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본서기』에 인용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향후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부’의 기원은 물론 ‘사신’으로서의 ‘임나일본부’에서 ‘기관’으로 완전히 정착하는 『일본서기』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변화과정을 단계화하여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