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 남측의 구아리유적에서 출토된 「大王天下(대왕천하)」가 새겨져 있는 一斤銘의 分銅을 만든 석재주형과 「大王王夫(대왕왕부)」명의 연화문 와당, 「天王」명의 와당의 존재는 백제에도 천하관이 유행했음을 말해주는 자료로 보았다.
사비천도 전후 백제에서 보이는 천하관은 무령왕이 512년에 남조의 양에 견사한 이후 양국 간에 활발했던 유불교류를 사상적 기반에 두고 있다. 백제는 『양직공도』에 의하면 521년 對梁 외교에서 「旁小國(방소국)」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양과 불교적인 조공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서역·남해제국이 백제에 앞서 「旁小國」 개념을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외적으로 발전했던 백제왕권은 양으로부터 유불 사상이라는 천하관을 수용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양의 불교적인 세계관을 수용했다. 백제 성왕이 최초로 착수했던 문화사업은 무제의 효를 보여주는 大通寺(대통사)의 창건이었다. 백제는 대국 양의 善藏天子(선장천자)인 무제를 불교적으로 공헌하고, 이에 의해 자신도 「旁小國」을 갖는 대국의 성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얻으려고 하였다. 게다가 백제는 양의 선진적인 유불사상을 활용하여 독자의 천하관을 형성해가면서 그 지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사비천도 이후 백제는 천하관이 완전히 정착·전개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도성의 중심에 위치한 정림사로 보았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