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정약용의 백제사 인식을 재조(在朝)기와 강진 유배기로 나누어 고찰하고, 이를 통해 정약용의 백제사 인식의 특징을 도출하였다. 정약용은 백제사를 한성시대 이래, 웅진․사비시대까지 강국으로 보았다. 그리고 역사에서 도덕적 요인보다는 지리적 요인이라는 객관적 형세를 중시하였고, 백제의 멸망 원인도 지리적 요인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영남남인과 구별되는 기호남인계 실학자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정약용 백제사 인식의 사학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의 삼한 인식을 계승한 것이며 양자의 중간에 있는 『동사강목』의 역사지리 고증의 영향도 받았다고 생각된다. 정약용의 이러한 초기 백제의 수도 변천 및 그 위치 비정은 이후 한진서의 『해동역사』「지리고」 및 김정호의 『대동지지』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근대 이후 학자들 가운데에도 정약용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지지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또한 정약용은 근대 이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제시되어 한국인 학자들에게 이어진,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연대에 대한 회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정약용의 역사지리 비정은 대체로 『후한서』에 기초하며 『삼국지』와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것은 『삼국지』와의 차이에 대하여 주목하는 근대 이후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요인의 설명에서 도덕적 요인보다는 지리적 요인에 입각해 설명하고자 한 것은 주자학의 명분론적 도덕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서 객관적 형세를 중시하는 것은 이미 성호 이익 단계에 나타났으나 정약용 단계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역사지리학과 결부시키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근대 이후의 우리 역사학과 실학의 연구성과와의 단절을 21세기 한국사 연구가 새로이 잇고자 할 때, 정약용의 백제사 연구가 현재 우리에게 갖는 의미 또는 우리에게 제시하는 과제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