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白濟王神社의 창립
III. 白濟王神社의 변천
IV. 白濟王神社의 운영실태
V. 결론
요약
율령국가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백제왕씨는 『新撰姓氏錄』이 성립했을 무렵 천황의 외척으로 고급귀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나 100년 이상 지난후 『延喜式神名帳』이 편찬되었을 무렵 이미 외척도 아니고 고급귀족도 아니었다. 또한 당시에 동국 경영은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백제왕씨의 우수분야였던 군사면에서의 출세도 어려웠고 성도 三松氏라고 일본풍으로 바꾸고 있었다. 게다가 백제왕씨가 交野原 中宮에 창건한 당시의 백제왕신사는 「백제왕령사묘」였다. 그러므로 『神名帳』에 기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의 미츠마츠씨는 交野검교로서 오랫동안 백제왕령사묘를 계속 지켜왔는데 太閤検地로 선조전래의 토지를 잃어버려, 禁野村大垣內에게 이전했다. 그 후 당분간 사묘의 제사를 계속 지냈지만 그것도 이룰 수 없게 되어 제사봉사는 진언종매방의 승려와 궁좌의 사람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그 후 명치유신 때 활약하는 三松俊明․俊季와 대정 시대 枚方町長이 되는 三松俊夫를 배출해, 현재도 미츠마츠씨 가계는 존속하면서 백제왕신사의 설날제․추대제에 본가․분가 모두 참가하고 있다.
후에 합사된 우두천왕은 일본의 건국신화의 수사노오의 화신으로 여겨진 불교의 부처이며 신라와 관련이 깊은 신이었다. 불교가 일본 열도에 전래된 이래 기반의 민속신앙 형태인 신사신앙과의 융화를 도모하면서 발전해 가는 가운데 생긴 것이 신불습합 사상이었다. 신불습합 과정에서 일본의 신은 부처와 일심동체가 되어, 우두천왕은 약사여래를 본지불로 신도의 수사노오와 습합해 수사노오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백제왕신사에서도 신라와 관련 깊은 수사노오를 역병퇴치에 영험이 뚜렷한 약사여래의 화신인 우두천왕을 받아들이고 제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후 백제왕신사는 창건 이래 1200년 이상의 시간을 거쳐 창건 당시의 위치에 ‘백제왕’의 이름을 쓴 채 현존한다. 고대사회가 해체되어 혈연관계에 의거하는 氏神信仰으로부터, 지연관계에 의거하는 産土神信仰으로 크게 변화했다. 백제왕신사는 백제왕씨라고 하는 귀족의 후예를 대신하여 中宮마을을 하나로 통합하기위해 신사신앙을 필요로 한 사람들에 의지해 운영되어, 일반민중의 생활에 ‘우리들의 씨신이여․고향을 지키는 신이여’라고 하는 의식이 깊게 뿌리 내리게 되었다. 게다가 명치정부의 국가신도 정책에 의해 뿌리깊게 침투하여 생활습과 자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국가의 감독에서 벗어난 신사는 중교법인이 되어, 각각 자주적으로 운영되어 백제왕신사는 궁사가 상주가 되었다. 자주독립한 백제왕신사는 궁사를 중심으로 많은 고생을 거듭하면서 지금도 존재하는 씨자총대를 중심으로 하는 씨자조직을 살려 ‘백제왕’이라고 하는 이름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中宮의 땅에 뿌리 내린 제사의례를 계속 지키고 있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