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금석문과 목간 자료의 수집과 정리
Ⅲ. 해야 할 과제
Ⅳ.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
요약
본고는 금석문이 보여주는 내용 몇 가지를 재해석해 본 것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토기나 기와 및 전돌에 새긴 글자, 나무 조각에 쓴 木簡, 고분의 벽과 漆器에 쓰인 글씨 등도 금석문의 개념 속에 모두 포괄시키고 있다. 필자는 금속이나 돌에 새긴 것만 금석문으로, 나무에 쓴 것은 목간으로, 붓으로 쓴 것은 墨書로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백제와 신라는 논에 대한 표기를 달리 하였다. 백제는 水田으로, 신라는 畓으로 하였다. 답자는 신라가 만들어낸 글자이다. 이는 통일신라 이후 보편화되었다. 영천청제비에서 삼국이 저수지를 표기하는 방법은 달랐다. 7세기 이전 신라는 塢로, 고구려는 吐로, 백제는 池로 표기하였다. 7세기 이후에는 堤(隄)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논에 물을 대는 시설은 洑라 하였고, 저수지의 물을 밖으로 빼내는 시설을 배굴리라하였다. 이 배굴리는 고려시대 이후에는 水桶 또는 木桶으로 표기되었다.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此七王等’이 나온다. 이를 ‘7명의 왕들’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等’은 복수의 의미로, ‘왕’은 ‘님’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읽으면 ‘此七王等’은 ‘이 일곱님들’로 해석되어 이들은 왕이 아닌 것이다.
미륵사지西塔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는 사탁적덕의 딸로 나온다. 이를 근거로 선화공주를 허구의 존재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선화공주가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선화공주와 사타씨 왕후 모두를 왕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561년에 만들어진 창녕비에는 大一伐干이 나온다. 대일벌간은 특별한 공로를 세운 유력한 귀족들에게 주어지는 非常의 관등이다. 이 비상위가 만들어진 시기는 법흥왕이 대왕으로 격상된 535년 이후 진흥왕이 활발하게 정복활동을 한 551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울진봉평신라비〉에는 지방세력에게 준 관등인 外位의 하나로 下干支가 나온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봉평비가 만들어진 524년 당시에는 하간지가 가장 높은 외위라는 전제 위에서 신라의 外位制는 524년 이후 561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524년 당시 울진 지역은 신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이 낮았다. 따라서 위상이 높은 지역의 지방 세력들은 하간지보다 높은 외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필자는 봉평비가 만들어진 시기에 외위제가 완성된 것으로 본다.
5~6세기에 신라와 고구려는 왕을 대왕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백제의 경우 사리봉안기에 무왕을 대왕으로 표기한 내용이 나왔다. 왕의 칭호가 대왕으로의 격상됨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 신라와 백제는 대왕 아래에 제후왕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경우 울주 천전리서석 追銘에 갈문왕을 왕으로 표기한 것과 七支刀 명문에 백제가 왜왕을 侯王으로 표현한 것이 그 사례가 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