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제 제기
Ⅱ. 初期百濟 시기의 저수지
Ⅲ. 벽골제의 初築 시기와 기능
Ⅳ. 벽골제의 修築 과정과 增築 배경
요약
근래에 안동 저전리 저수지 발굴, 보성 조성리 수리시설 발굴 등은 저수지 축조 시기를 청동기시대로까지 올려볼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저수지 관련 기사도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나오는 國名 가운데 저수지의 의미를 포함하는 국명의 경우 그 지역에 저수지가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하였다.
그러나 초기백제 시기에는 저수지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대규모 저수지는 중앙집권력의 성장과 궤도를 같이 한다. 백제도 중앙집권력의 강화를 위해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제 벽골제이다. 벽골제의 초축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벽골제의 초축 시기는 4세기 전반 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벽골제의 기능에 대해 저수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근에 방조제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벽골제는 790년에 增築되었고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도 증축되었다. 방조제설을 주장하려면 이 증축 공사가 해수면의 상승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검증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벽골제는 방조제는 아닌 것이다. 문헌자료에 의해 修築 과정을 보면 원성왕 7년(790)의 증축, 고려 顯宗(1010~1031) 대의 修完, 고려 仁宗 21년(1143)의 修復, 조선 太宗 15년(1415)의 重修에 걸치고 있다. 여기에 510년 무령왕의 “完固堤防” 조치도 포함하면 모두 5번에 걸쳐 수치가 이루어진 셈이다. 한편 「벽골제중수기」에 의할 때 1415년의 수축 작업은 潮波의 奮激이 심한 大極浦 지역에는 조파를 막는 제언을 세웠고, 큰 웅덩이가 만들어진 楊枝橋 지역에는 목책을 세웠으며, 제방 위의 頹碑된 부분은 흙을 메워 평평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벽골제발굴보고서」에 의하면 A지구에서는 2번에 걸쳐, B지구에서는 4번에 걸쳐 수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제방의 전체 높이는 4.5m 정도였는데 1차 築土의 높이는 약 2.5m였다고 한다. 발굴조사에서 얻어진 결과와 문헌 자료의 내용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를 종합하면 1차 축토의 높이 2.5m는 초축 당시의 제방의 높이이고, 약 1.6-l.7m의 높이의 2차 축토는 원성왕대의 대대적인 증축 사업의 결과로 파악된다. 그리고 B지구에서 빈번한 보수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이곳에 食物炭化層이 두껍게 쌓여있다는 사실과 또 石傀들이 混築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지반의 연약성 때문인 것 같다. 이로 미루어 보면 문헌 자료에 보이는 보수공사도 대개는 B지구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