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전투시 행군속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황산벌전투와 김유신이 당군에게 식량을 수송하기 위한 평양성 수송작전 사료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대략 하루 30여리 정도의 이동속도를 추정해볼 수 있었다. 군대의 행군속도를 일률적으로 일반화시키기 어렵다. 행군에 어려운 지형을 만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이동 통제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살수에서 패배한 수군이 만 하루만에 450리를 이동한 경우도 있었다. 하루 30여리의 행군속도는 지휘체계를 유지하면서 적의 기습에 대비하여 대형을 갖추고 치중부대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동했을 상황에 해당된다.
전토의 유형을 크게 성곽전과 지상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성곽전을 대비한 본진은 일반적으로 대략 목표지점 30~40여리 전방에 설치되었다. 성곽전투시 공자와 방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과 식량이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 양측은 적군의 사기를 죽이기 위하여 기싸움을 벌였다. 기싸움 이후에는 성벽접근이 가능하도록 해자를 메웠다. 이어 포차와 충차공격을 하였으며, 화공 또는 충제와 어량대도를 이용한 공격이 행해졌다. 이렇게 성벽을 확보하면 최후로 백병전이 벌어지고 성곽에 깃발을 꽂아 전투가 끝났음을 상징화시켰다.
지상전을 치루기 위해서도 먼저 본영이 설치되었다. 본영에는 각 제대별로 독립된 소영을 설치하였다. 각각의 영에는 누와 갱을 설치하여 적군의 접근은 차단시켰다. 그리고 소영을 지휘하는 지휘소와 본영을 지휘하는 총지휘소가 설치되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승패를 결정지었던 지상전은 군대의 사기와 지형, 병력운용과 진법이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전장으로 나아가는 총지휘관에게는 국왕으로부터 한정된 편의종사권이 부여되었다. 총지휘관의 명령을 받는 지휘관급 장군들도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일정한 권한을 총지휘관으로부터 위임받았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지휘를 위한 연락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검문․검색을 위한 일정한 약속이 있었으며, 행군시에도 고각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게 하여 지휘․연락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면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호령과 고함이 들리지 않는 실제 전투에서는 어떻게 지휘할 수 있었을까. 금고기휘가 그 해답이었다. 일반적으로 북소리에 진격하고 징소리에 퇴각하고 깃발로 진형을 변형시켰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