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백제가 1세기경에 이미 마한을 모두 멸망시키고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당시 기록인 『삼국지』에는 백제가 3세기에도 여전히 마한 50여국의 하나로서 작은 읍락국가에 불과하다고 적혀 있다.
백제는 마한 50여국을 차례차례 흡수하였다. 그리하여 늦어도 4세기 무렵에는 백제가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일대와 황해도·강원도·전라도 일부를 영토화하였으나,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실린 지명은 대개 북쪽의 고구려·말갈과의 전투기사, 남쪽의 마한·신라와의 전투기사와 관련한 것들이다. 내용 또한 모순이 적지 않아서 신뢰도가 낮은 편이다.
백제 초기의 대표적인 지방도시로는 흔히 미추홀이 손꼽힌다. 백제 건국설화에서 온조왕의 형인비류가 정착한 도시로서 광개토왕릉비에는 미추성으로 적혀 있다. 미추홀은 고려시대부터 지금의 인천지역이라고 널리 알려져 지금은 확고한 믿음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는 이자겸을 비롯한 인주 이씨 가문이 고려왕실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이며, 실제 미추홀은 임진강유역의 파주 양주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헌자료는 잘못된 전언, 의도적 거짓말에 휘둘릴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도시에 관한 해석은 고고자료를 중시해야 한다. 다만, 고고자료의 역사적 의미를 완벽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에 입각한 역사학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