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직공도」는 蕭繹(후에 元帝, 508~554)이 형주자사 재임(526~539)시 주변제국 사신의 용모를 자필로 묘사한 것을 양 무제의 재위 40년을 기념하여 결집한 두루마리 그림이다. 「양직공도」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모사본 4종이 전해진다. 하나는 1960년 소개된 남경박물원(현 북경 중국국가박물관) 소장의 북송대 모본이며, 다른 두 점은 1987년 알려진 대북의 고궁박물원에 「南唐顧德謙摹梁元帝審客人朝圖」와 「唐閻立本王會圖」, 그리고 2011년 찾아진 장경(1685~1760)이 연대 미상의 백묘 직공도를 1739년 모사한 것을 청말 葛嗣浵(1867~1935)이 재록한 「淸張庚諸審職貢圖」(이하 ‘장경모본’)이다. 「양직공도」모본 4종 가운데 사신도와 해당 국가의 題記가 남아있는 것은 남경박물원 구장본뿐이며, 대북 고궁박물원의 2점은 사신도만 남아있고, 장경모본은 제기만이 전한다. 장경모본의 사신도는 현재 확인할 수 없지만, 사신의 크기와 수효 및 채색여부 등은 갈사동의 기록이 전한다. 한편 모본 4종에 그려진 사신은 그 수효가 모두 다르다. 여기에 당송 이래 「양직공도」를 소장ㆍ소견한 기록까지 참조하면 사신의 수효와 기재 순서가 다른 모본의 수는 10여 종에 달한다. 동일 국가의 사신이라도 모습은 상이하며, 제기 또한 차이가 적지 않다. 모본은 형태에 있어서도 남경박물원 구장본과 고궁박물원 「당염입본왕회도」는 비단에 채색, 「남당고덕겸모양원제심객인조도」와 장경모본은 백묘본이다. 현존 「양직공도」 모본 4종은 소역이 그린 「양직공도」 원도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모사한 시기로 보면 「남당고덕겸모양원제심객인조도」→「남경박물원 구장본」→「당염입본왕회도」→「장경제심직공도」 순이지만, 어느 것이 사료적으로 우월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모본 간의 차이는 「양직공도」가 만들어진 이후 당송을 거쳐 명청에 이르는 류전의 양태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원도가 분본인지 아니면 백묘로 그려졌는지 알수 없어도, 고덕겸모본과 같이 완질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하면 지역별 사신도만을 나누어 제작한 모본도 상정할 수 있겠다. 나아가 뒤에 보는 대로 제기가 있는 것과 모본이 있었으며, 그 제기 또한 사신도의 수효와 마찬가지로 원문에서부터 여러 분량의 초록본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현존 「양직공도」는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변개되고, 변형된 모본사이의 교착도 예상된다. 그러나 정작 「양직공도」의 사신도와 제기 이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양대에 소역의 「직공도」 외에 양무제 초기에 활동한 강승보의 「직공도」, 배자야(467?~530?)가 남긴 20개국의 사신도에 역시 지리풍속 기사를 「방국사도」 등 여러 종의 직공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사신도와 유사한 이민족 조공사행 모습도 성행하였다. 고구려의 경우만 하여도 유송대 륙심미(?-485)가 그린 「고려자백마도」ㆍ「손형저고려의도」를 비롯하여, 고보광의 「고려투압도」 등이 당대까지 전존 혹은 모사되고 있었다. 요컨대 당송이래 원도와 여러 모본을 소장ㆍ소견한 기록과 함께 「양직공도」의 성립과 이의 유전 그리고 모본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규명은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