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미륵사와 『삼국사기』의 왕흥사의 관계
III. 법왕의 왕흥사(=미륵사) 창건 의도
IV. 무왕대의 왕흥사(=미륵사) 완성과 왕후의 역할
V. 맺음말
요약
미륵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는 구체적 자료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서 미륵사와 왕흥사 창건에 대해 서술하면서 두 사찰을 동일 사찰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합리적인 판단이라 평가된다. 실제로 최근 발굴에 의하면 미륵사 조영 시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흥사의 조영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옛 백제 지역의 사찰 중 왕실 주도하에 40여 년의 공사 끝에 완성된 왕흥사에 적합한 사찰로는 미륵사 외에 다른 사찰을 생각하기 힘들다.
법왕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한 배경과 관련하여서는 왕흥사 창건 이전에 법왕의 익산 거주 가능성이 주목된다. 미륵사와 같은 익산 지역에 있는 왕궁리 궁성유적은 법왕의 부왕인 왕자 혜(혜왕)에 의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법왕의 아들로서 어린 시절을 익산에서 보냈던 무왕은 부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왕흥사, 즉 미륵사를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익산의 궁성을 확대하고 제석사를 건설하는 등 익산 지역의 위상 강화에 노력하였다. 무왕대에 익산은 내세의 부처 미륵과 현실세계의 주재자 제석을 상징하는 두 개의 대규모 사찰이 자리한 신성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무왕 31년경부터 무왕을 대신하여 태자 의자가 국정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었고, 미륵사 건립의 최종 과정도 무왕 대신 왕후에 의해 주도되었다. 왕후는 서원과 동원의 건립을 주도하였으며, 그녀의 공덕은 미륵사 서원 석탑의 사리봉안기에서 부처님의 계승자로 찬탄되고 있다. 후대의 전승에서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무왕의 왕비는 미륵사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왕후의 모습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법왕과 무왕대 왕실의 발원에 의해 건립된 미륵사지만 그 영화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완성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백제가 멸망하면서 더 이상 왕실의 원찰이 아니라 지방의 일반 사찰로 위상이 변화되었다. 거대한 규모에 비해 역사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이러한 급격한 위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미 백제 멸망 이전에 미륵사가 자리한 익산 지역에 대한 백제 왕실의 관심은 이전에 비해 낮아지고 있었다. 의자왕대는 익산의 궁성은 사찰로 바뀌어 더 이상 운영되지 않았고, 국왕의 관심은 수도 사비의 태자궁 조영에 집중되었다. 부왕과 달리 익산 지역과의 인연이 깊지 않았던 의자왕대 왕실에 있어 익산의 중요성은 크게 감소 되었던 때문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륵사도 애초의 이름이었던 왕흥사를 잃고 미륵사로만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