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맥의 명칭은 이미 주대의 시경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주초에 예맥은 한과 더불어 주의 동북방에 주거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국시대 연의 세력확장은 이들에 영향을 미쳤고 진시황의 역, 고조선의 왕실교체, 위만조선의 흥망, 한사군 설치 등은 북방계 주민의 반도내 남방으로의 이주를 초래했다. 자체내 세력 갈등, 기후조건도 이주의 요인이 되었다. 삼국사기 해부루전설은 그 명칭에서 보듯 동예를 부여계통의 일족이 이동한 것으로 보아 부여를 구성한 주족단을 예족으로 보았고 고구려 구성은 맥족으로 보았다. 중국 사서는 부여를 예로 칭했고 예맥이라 하였으나 예라고는 하지 않았다는게 근거하였다. 춘천맥국설은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하는 맥족의 일파가 북방정세의 다변화, 내적 요인에 의해 반도내로 이주한 것이다. 필자는 예와 맥을 연칭이 아닌 단칭으로 보았으며 양자 모두를 족명으로 보았다. 예맥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며 이들은 한대이후 고구려, 부여 등 새로운 국명을 갖게 되자 원래 이들을 지칭했던 예와 맥은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한서이후 삼국지 후한서에 이르면 상당히 혼동되며 예, 맥, 예맥의 연칭으로 쓰여져 예맥을 같은 성질의 것으로 볼지 단칭으로 쓰여져 예와 맥을 구분해야 할지 구별하기 어렵고 고구려, 부여가 새로운 국명으로 나타나 이전의 예맥의 개념은 망각되어 반도 동북쪽에 자리잡은 동예를 지칭하기 이른다. 삼국지 이후 사서는 더 많은 혼란이 생기는데 부여, 고구려의 구성체로서 예맥의 개념은 오직 동해안의 예만 생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고금군국지를 인용하여 춘천을 맥국으로 강릉을 예국으로 비정하게 되고 삼국유사, 고려사 역시 그렇다. 조선시대 정약용과 문헌비고의 찬자 제외한 많은 선유들은 예맥 개념을 반도내 강릉과 춘천으로 고정시켰고 태조 3년이후 행정지역이 되는 강원도를 예맥지본으로 봄이 무리함을 지적하였다. 필자는 고금군국지를 따르며 춘천의 북방식 지석묘의 남방한계가 춘천이라는데 주목하고 적석총 축조 집단이 서북계통의 주민임에 주목한다. 삼국사기 유리왕조의 맥국기록과 책계왕조 맥국기록과 수서 백제전을 통해 춘천맥국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맥국왕궁터로 전해오는 발산리 지역의 지명고증과 전설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맥국은 삼국사기, 수서에 의하여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남도까지 북상하여 영토를 확장하던 진흥왕대 이전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