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유역은 한강하류 일대의 한반도 중서부를 지칭하는 오늘날의 수도권을 말한다. 그러나 선사시대는 한강하류일대를, 백제시대는 서울~광주권을 지칭하였으나 신라시대는 임진강 이남과 남양만까지를 포괄하였다. 그 후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예성강 이남까지를 포함하였으며 그 전초기지가 패강진이 되었지만 이때는 한강유역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대개 이 지역에 백제시대에는 정치적 문화적 성격이 강했으나 신라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가 컸다.
한강유역은 북, 동, 남쪽으로 산악이 둘러싸였고 서쪽이 바다에 면한 산, 바다 그리고 평야가 조화된 천혜의 요지로서 한강이 공감대를 이루어 문화적 공통성을 지닌다. 특히 한강하류의 비옥한 충적평야 속에 깃든 풍부한 생산력과 인적자원은 이 지역의 정치적 발전에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선사 이래 대표적인 문화유적지가 되었다. 남북세력간의 충돌지로서 삼국시대 쟁투전의 시험지가 되었다. 한강유역의 가장 큰 역사적 성격은 남북문화의 경계지로 두 문화를 융합하여 새 문화건설의 잠재력을 지닌 데 있다. 여기에는 선진중국문화와의 이른 접촉과 교류라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백제 사회는 이 지역 보존이 정치의 전부였으나 이 지역 수호와 보존에 지나치게 국력을 소모했기에 결국 그 상실이 국가 쇠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의한 한강유역 점령은 그 나라의 황금기를 예고하는 것이며 신라의 점유는 삼국의 세력판도를 바꾸게 하였다. 통일신라에는 당군의 전략적 요충지가 된 이래 북방경비의 전초기지가 되어 정치적 문화적 의미는 줄었다. 더구나 대중항로로서 큰 몫을 하던 당항진도 청해진의 설치 등으로 그 기능을 잃어 한강유역의 가치가 줄었다.
이같은 정치적 기능의 감소는 신라 자체의 쇠퇴를 뜻하였다. 통일신라말에 이르러 변방으로 전락된 한강유역은 새로운 세력자들에 의해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받아들이게 되고 독자적 세력의 성장으로 나말여초에 왕건으로 대표되는 신흥호족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