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로 인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발전에 제약을 받았고 이들에 비해 족적 전통이 약한 유이민 집단이 이룩한 사회로 통제력이 약하여 유동적이 대외지향적일 수 밖에 없었다. 고대 동북아에서 중앙적 위치와 한반도 서남해의 전연적 항구, 황해를 끼고 분포한 동이문화권의 전통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 군현, 가야 해상무역 기능을 인수, 계승하여 일찍이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 대륙의 오호십육국 혼란기에 요서 지역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무역중계지로 기능한 것 같으나 고구려의 남하로 한성을 함락 당한 후 남조와 관계 강화를 통해 국가 유지 및 안정을 도모, 선진 문물 도입하였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백제는 남조의 요청을 받아들여 북중국에서의 군사활동에 의해 남조를 지원하였고 백제인이 갖던 중국식 작호는 국내적으로 유력 귀족세력에게 주어지고 국외적으로 남조와 무역권 인정, 북중국에서의 군사활동에 대한 논공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백제는 이 같은 형식을 왜와의 관계에 그대로 채용하였다.
백제의 광범한 대외활동은 동북아 해상권의 장악에 따른 중국 대륙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세력권 형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무역활동을 전제로 해야 이해가 수월할 것이다. 즉 해상세력권 유지는 국력의 분산을 가져오고 오히려 남조에 이용당하거나 대륙활동으로 생긴 공백을 왜병의 지원으로 메꾸는 등 커다란 과오가 있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