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문헌비고의 기록과 대조하며 삼국사기 지진기사 총정리한 결과 117회의 지진기록을 확인하였다. 지진은 8.5년을 주기로 발생된 지변으로 지진의 강약에 따라 산붕, 지함, 지동, 지열, 탑동, 석퇴, 문자양 등 다양한 표현을 갖는다. 지동은 양진으로 간주되며 지진은 탑동, 문자양은 중진, 지열은 강진으로 생각된다. 지열과 산붕은 열진 또는 격진으로 파악하였다. 지진이 7~8세기에 집중된 사실을 천문학의 발달보다 광범한 유교정치이념의 구현으로 풀이하였다.
지진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보다 오행사상에서 찾을 수 있으며 여주의 전횡, 빈번한 궁정의 수축, 그리고 왕의 실정에 대한 경고였다. 동시에 도학적인 유교정치구현의 계속적인 권장으로도 지진은 발생되었다. 이는 전형적인 정치안정기인 성덕왕대의 8회의 지진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것은 지진을 오행사상의 범주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신라의 독자적인 정치사상의 발전을 따라 지진은 무엇보다 당대 정치에 대한 비판과 경고로 간주되며 동시에 정치적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거는 47회의 통일신라 지진에서 13회는 왕의 대신임명후에 발생했고 지진직후 14회의 대신교체가 단행되었다는데 있다.
지진의 정치적 의미는 왕의 정치적 반성과 함께 죽음, 전쟁의 예고이기도 했다. 신라의 경우 10회의 사망과 11회의 전쟁과 연결되었으며 통일신라는 13회가 죽음을 전제하는 천변이었다. 특히 지진발생시기가 춘동계에 집중되는 것과 왕의 정치행위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지진발생에 따른 치자의 정치적 반성이 단순한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고대의 정치발전의 계기가되었다는 데 주목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