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매지권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웅진시대 백제의 조세제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무령왕 매지권에는 토지매매대금․매매건명․買主․賣主와 매매한 날짜, 그리고 율령 관계문구 등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서 토지를 매매하고 나서 이러한 매지권을 작성하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었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중국의 경우와 달랐다. 무령왕 매지권은 비록 현실세계의 토지매매가 아닌 死者와 土地神사이에 이루어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작성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당시 백제 현실세계의 토지와 관련된 관행들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무령왕 매지권은 당시 백제사회의 경제제도의 내용을 파악해 들어가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자료가 되는 셈이다. 백제 조세제도라고 해서 여기에서 예외일 까닭이 없다.
무령왕 매지권의 내용 가운데 백제의 조세제도와 관련하여 가장 큰 주의를 끄는 것은 토지의 표시방식이다. 이 매지권에는 무령왕이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는 토지가 申地로 표시되어 있다. 당시 중국의 매지권에서는 매입한 토지의 위치․면적․四至를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령왕 매지권에서 방향으로 토지를 표시한 것은 그 때까지도 백제에서는 국가적 양전이 실시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즉 6세기 초반경의 백제 조세제도는 국가적 양전이 실시되지 못한 토대 위에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백제에서 현물로 거두어들이던 조세는 후대의 田租나 貢賦(調) 등과 같은 세목으로 세분화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백제에서는 그와 같이 세분되지 않은, 즉 미분화된 조세를 수취했던 것이다. 그 미분화된 조세는 인두세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백제에서 그와 같이 미숙한 단계의 조세부과방식을 채택하게 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주된 담세자였던 일반민들의 사회적 계급분화의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대체로 人頭의 다과가 경제력의 우열과 비례하게 마련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성격의 조세를 수취하더라도 조세수취의 형평성의 면 등에서 커다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당시의 지방통치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 시기의 지방통치체제는 흔히 檐魯制로 불리우는데, 담로제는 일반적으로 전국의 주요 거점에 담로를 파견하여 각 거점과 그 주변 지역을 통치하게 하는 간접지배방식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田租나 調등으로 세분화된 조세를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양전을 실시하거나 戶等을 산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거니와, 설사 실시하려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