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Ⅰ. 미사리 ‘경작유구’를 통해서 본 4~6세기 밭농사체계
Ⅱ. 수리관개기술의 발달과 수전의 확대
1. 초기 수전경영의 특징
2. 수리관개시설의 확충과 乾田의 水田化
맺음말
요약
5~6세기 밭농사체계와 백제초기 수전경영의 양상, 5세기 이후 수리관개시설의 확충에 따란 건전의 수전화와 그것을 매개로 한 백제의 지방통제 강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미사리유적에서 상층과 하층의 삼국시대 경작유구 2개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휴한농법 단계에서 초보적인 수준의 상경농법 단계로 이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 수전경작도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곳이 沼澤地나 저습지 근처이다. 그러나 이곳에 조성된 수전은 담수전이기 때문에 산소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根腐현상이 나타난다. 근부현상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논물을 전부 빼고 건조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다. 이것이 가능한 수전은 주로 건전지역에 위치한다.
건전지역을 수전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저수지나 수리 시설의 축조가 전제된다. 백제는 5세기부터 대규모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다. 이외에 평지형의 저수지도 축조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이것은 노력에 비해 저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다. 또한 작은 규모의 수리시설이나 장대한 인공수로, 하천과 하천을 연결하는 수로 등과 같은 수리시설을 만들어서 수전에 관개하였다. 대규모 수리관개시설의 축조로 건전지역까지도 수전으로 조성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건전의 수전화는 농업생산성의 증대와 직결되었다고 하겠다.
대규모 수리관개시설의 축조는 부차적으로 여러 가지 사회적 변동을 야기한다. 수리관개시설의 건설은 여러 집단 간의 갈등을 수반하였다. 그 건설을 국가가 주도하는 경우, 국가권력이 지방의 정치세력을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대규모 수리관개시설의 건설과정은 국가권력의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의 강화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백제는 5세기에 대규모 수리관개시설의 확충을 통해 한강유역이나 충남․북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영역화작업을 진행시켜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6세기 전반부터 전남․북지방에 위치한 마한세력의 통합에 적극 나섰는데, 이와 관련하여 무녕왕 10년(510)에 왕이 ‘제방을 완고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린 사실이 주의된다. 기본적으로 수리관개시설의 축조 과정 자체가 지방의 영역화 작업과 맞물려 있었던 바, 이 지시 역시 백제국가가 마한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그것을 기초로 그 지역을 국가의 지방통치조직으로 편제하려는 의도와 결코 무관하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제는 6세기 중엽에 이러한 기초작업을 토대로 방군성제를 완비한 바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