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들은 질병은 厲鬼가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고구려 유리명왕때 억울하게 죽은 탁리와 사비의 빌미로 유리명왕이 병을 얻었다고 생각한 일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삼국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진평왕대 가잠성 현령이었던 찬덕이 백제군의 줄기찬 공격으로 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느티나무에 부딪쳐 죽으면서 큰 여귀가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죽이겠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신앙을 나타낸다. 또한 정치의 좋고 나쁨에 따라 오행에 변화도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악기가 발생하여 역질이 생긴다는 사상도 있었다. 이것은 유가적인 왕도관념과 연결되는 사상으로 주목되며 통일 신라 이후에 적용되었던 것 같다.
치병을 담당했던 사람들로는 무와 승려를 우선 들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무의 치병의례로서 제와 謝가 기록되어 있다. 승려가 치병하는 경우는 약사경의 송독과 呪를 주로 사용하였다. 신라의 승려가 약을 복용할 때 읊도록 만든 呪가 일본의 고대 의서인 『醫心方』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병자는 동쪽을 향해 약사불, 약사보살등이 병을 치료하니 오장육부가 조화를 이루어 건강하게 해달라고 주를 외우고 약을 복용하였던 것이다. 주에 능했던 승려는 呪禁師로도 불리웠던 것 같다. 578년에 백제에서 일본에 파견된 주금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중국의 주금사는 수당대(587~907)에 처음으로 의료기구에 속한 의관으로 세워졌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백제의 주금사는 주에 능했던 승려로서 주금의 방법으로 치료를 담당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의료기구에 주금사를 두지 않았던 것은 승려가 주금으로 치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의학이 수용되면서 중국의학적 관점에서 질병관을 논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녹진열전의 녹진의 질병관은 당시 지배층의 수준 높은 중국의학지식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의료기구에서 특이한 점은 중국과 달리 줄곧 藥師, 藥部, 藥典 등과 같이 藥이란 글자로 의료기구의 명칭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에서 일본에 파견된 의관 가운데 採藥師가 있는 점도 수당대 의료제도와는 다른 점이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중국의학을 수용하면서도 우리 생태환경에 맞는 약을 개발하고 이용하려한 노력이 관료제도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