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사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필자는 5세기 중~6세기 초로 추정하였다. 능산리사원의 창건연대는 기존의 견해와 같이 사리감을 근거로 보면 567년이지만, 554~567년에도 불교사원이 아닌 다른 건물이 있었다고 보았다. 고구려 集安 왕릉의 陵園, 陵寢制度는 전체적으로 漢代 능침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지만, 평양 왕릉의 능침제도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다.
능산리사원과 정릉사는 백제 능산리고분, 고구려 전동명왕릉이 축조될 당시 능원, 능침제도 속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였다. 중국 북위 사원불사(5세기 후기)는 무덤을 만들 당시에 함께 건립되었고 묘주인이 직접 조성하였다. 남조 황기사(6세기 초기), 백제 능산리사원은 무덤이 완공된 이후 10~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건립되었고 발원자도 묘주인의 아들이었음을 밝히게 되었다.
능사에서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빌거나 제의 등의 활동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황기사, 사원불사는 능사로써 10여년 사용된 것과는 달리 고구려 정릉사, 백제 능산리사원은 100여년 명맥이 유지되었다. 사원불사는 영고릉, 황기사는 建陵 등 특정한 무덤과 특정한 帝后를 위해서 사용되었던 陵寺이었지만 정릉사는 전동명왕릉과 진파리고분군, 능산리사원은 능산리고분군 등 다수의 무덤과 다수의 왕들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정릉사와 능산리사원의 승방지 등 주거공간에서는 온돌이 대량으로 발굴되었고 고구려, 백제 주거지에서도 온돌이 많이 확인된다. 사원불사의 승방지에서도 온돌은 발견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유행한 시설은 아니었다. 그리고 능산리사원지 내 특수한 유적지로 공방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공방은 왕실이 운영한 관영공방으로 추정되며 사원 내에서 필요한 제품을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