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당대 금석문 조사 현황
Ⅲ. 삼국 관련 당대 묘지
Ⅳ. 당대 묘지의 삼국 표기
Ⅴ. 삼국 표기에 대한 몇 가지 문제
Ⅵ. 맺음말
요약
삼국 관련 당나라 묘지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구려・백제 유민과 재당신라인 곧 재당 한인 묘지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과 접촉한 당나라 사람의 묘지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재당 한인 묘지는 31점에 불과하나, 재당 한인들의 활동과 행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삼국과 접촉한 당인 묘지는 주로 수・당대 삼국 침략에 참전했거나 사절로서 삼국에 다녀간 사실을 기록한 중국인들 것으로, 수・당대 고구려 출병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가 가장 많다.
삼국 관련 당나라 묘지에는 삼국을 다양한 용어로 표기하였다. 그것들은 특정 지명, 종족명, 행정명칭의 세 가지 형태로 해당국의 이름을 대신하였다. 당대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가장 다양한 명칭으로 표기하였는데, 고구려의 정식 국호 대신에 대부분 다른 사물에 빗대어 고구려를 지칭하였다.
모든 국호는 나름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당대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고구려라 부르지 않은 것은 오랫동안 이어온 두 지역간의 투쟁, 특히 엄청난 피해를 입은 수・당대 고구려와의 전쟁과 갈등 속에서 쌓인 仇怨意識이랄까 증오심의 발로가 아닐까 한다. 뿐만 아니라 당대 묘지는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에 대한 緣故意識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대 묘지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삼한이라 일컬었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고구려를 삼한이라 칭하였다. 이는 당대에 이미 삼한삼국론이 일반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한반도 삼국에 대하여 진한과 마한을 혼용하였다. 통계 자료로서는 다소 불완전하나 현전하는 당대 묘지 자료를 종합해보면, 당나라 사람들은 680년대 이전까지 고구려를 진한이라 하다가 그 이후에는 백제와 신라를 진한이라 칭하였고 대신 고구려를 마한이라 하였다.(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