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 과제로 설정한 雄略紀 2년조에 인용된 「百濟新撰」의 ‘己巳年蓋鹵王立’ 기사에 대하여 종래의 연구는 모두 紀年을 중심축으로 하여 王名을 바꾸는 방식으로 해결을 모색해왔으나 필자는 이러한 연구 경향에 이의를 제기하며 왕명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도 유효함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앞에서 즉위 간지와 왕명을 모순 없이 해결하는 방안으로서 「百濟新撰」에 2세기의 개로왕의 즉위 기사가 5세기의 개로왕의 즉위 기사로 잘못 수록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웅략기 2년-同 5년조의 일련의 내용은 5세기의 개로왕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개로왕의 즉위 간지는 2세기의 왕의 그것을 채용해버렸기에 결과적으로 모순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면 검토 결과 파생되는 논리로서 백제의 초기 시대의 인물인 4대 개로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성과이다. 백제사에 보이는 근개로왕․근초고왕․근구수왕등의 왕명은 그 이전 시기에 개로왕․초고왕․구수왕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인데 위에서 검토한 ‘己巳年蓋鹵王立’ 사료의 존재에서 우리는 백제 초기의 그 개로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百濟新撰」의 정리에 이용된 백제의 原史料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도 아울러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三國史記』의 초기 개로왕과 「百濟新撰」 속의 개로왕의 즉위 연도가 일치한다는 것은 『三國史記』의 개로왕 즉위의 바탕이 된 사료 「百濟新撰」의 기사 편성의 바탕이 된 사료가 모두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료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원래 백제 내에 백제 초기의 왕력이 일정한 사료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문제의 기사년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료의 부족이라는 결정 한계 때문에 시종 추론으로 일관하는 셈이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