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9월 이후 한신대학교 박물관은 풍납토성 내부의 중앙부에 해당되는 경당지구를 발굴 조사하였다.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한성 백제의 문화를 규명하는 데에 필요한 많은 자료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특히 국내외 사서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던 관직명인 ‘大夫’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백제의 지배구조에 하나의 문제점을 던졌다.
중국에서는 봉건제가 시행되고, 漢代 이후 관료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대부의 성격이 변화하였다. 그리고 漢代 대부는 宮內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대부는 관료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설치되고 있었다.
풍납토성 경당연립지구에서 발견된 大夫는 국내외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먼저 경당지구에서 발견된 대부를 하나의 관직으로 볼 수 있는지, 이와 유사한 사례는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창녕 계성동 고분군과 동해 추암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大干’명이 신라의 관등 표기 방식의 영향 아래 사용된 外位의 異稱일 가능성이 높은 점을 볼 때 경당지구의 대부도 관직명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백제에서 대부라는 관직명이 사용된 시기는 5세기 중 후반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대부명이 발견된 9호 유구는 수 차례에 걸쳐 유물이 퇴적된 양상인데 각 층마다의 시기차는 그리 크지 않으며 출토된 유물은 5세기 중 후반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5세기 중 후반대는 백제의 개로왕대에 해당된다. 따라서 대부는 개로왕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백제의 대부는 왕실에서 제의라는 특정한 직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로왕은 체제정비와 함께 그의 권력행사를 합법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측면의 변화를 강화하고 있었다. 개로왕은 부여 멸망 후 백제가 부여의 계승국가라는 인식을 대내외적으로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부여의 시조로서의 동명과 백제의 시조인 건국자의 존재를 분리하였다. 신화에서 동명과 온조의 분리는 제의체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9호 유구가 제의와 관련된 공간이라는 점은 백제에서 대부의 직무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