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I.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삼국의 국제관계 형성
II. 7세기 이전 삼국간의 和·戰 반복과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활용
III. 義慈王 관련 자료의 문제점과 義慈王의 實相
IV. 7세기 중엽 義慈王의 政治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
V. 655년 집권체제의 재확립과
義慈王에 대한 평가문제
결어
요약
의자왕에 대한 재평가라는 대전제 위에서 그의 정치활동 모습과 그로 인해 야기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 내용을 살펴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그에 대한 기존 평가의 문제점 지적과 함께 새로운 평가를 제시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삼국 간의 관계는 시대적인 상황 변화가 있을 때마다 和․戰의 반복을 보이며 수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속에서도 6세기 중기에 들어와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깨지면서 백제가 신라를 최대의 적으로 생각하게 된 사실은 주목된다. 중국과의 관계는 백제와 신라는 그 관계가 복잡하게 활용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립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고구려는 和․戰을 반복하는 속에서 대중국 관계를 이어온 것으로 백제나 신라와는 차별성이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속에서 의자왕은 집권 초기부터 말기까지 강한 의욕을 가지고 대내외적인 정치를 수행해왔다. 대내적인 측면에서 보면 초기에는 무왕대의 정치기반을 이어받아 이용하다가 655년 이후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집권체제를 확립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는 과감히 독자적인 정치노선을 채택함으로써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촉매 역할도 담당하였다.
다만 의자왕의 이와 같은 정치노선은 적국인 신라로부터 강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내치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으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중국에게는 그가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국제적인 문제아로 비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659년 4월 백제의 공격에 대한 신라의 구원병 요청을 받아들인 당 고종이 660년 3월 당의 장군 소정방 등에게 13만군을 거느리고 가 백제를 정벌하도록 명령을 내림으로써 중국의 무력간섭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그 결과 예상 밖으로 나타난 나당 연합군의 공세 앞에서 의자왕은 어쩔 수 없이 660년 7월 18일 항복하고 8월 2일 항복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바, 외치에서의 실패는 그가 백제를 몰락하도록 만든 비운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남도록 하였으며, 후대인들로부터 사실과 달리 많은 왜곡된 평가를 받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