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언
Ⅱ. 고대 한일외교의 성립과 배경
Ⅲ. 고대 한일외교의 제단계
Ⅳ. 고대 한일외교의 특징과 그 성격
Ⅴ. 결어
요약
한반도 삼국과 왜국간의 300년 외교사를 조망하였다. 4세기 말 고구려의 남정은 고대 한일외교사의 대사건이었다. 백제는 왜 왕권과 손을 잡았고 양자는 이후 강한 결합력을 갖고 동아시아 정세에 대처해 나간다. 6세기 후반까지 왜의 대외관계는 백제일변도였고 기타의 2국과는 대립적 강경노선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왜 관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구려 입장에서 고구려 우위적 한반도 정세에서 왜국은 배제된 상태였고, 왜는 고구려를 경계와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신라의 대왜 외교는 백제․왜관계의 결합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번번히 실패하였다.
6세기 후반 신라가 한수유역을 차지하고 동북방면으로는 고구려 영역을 잠식함에 이르러 고구려는 이제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대왜외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게다가 수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시기에 대왜외교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신라 역시 현실적 우위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수에 견사하면서 대왜외교를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정세변화에 직면하여 왜 왕권도 동아시아 제국 전체를 상대로 한 다면외교로 전환하였다. 특히 견수사의 파견으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견수사의 주요 해상교통로를 장악하고 있던 신라와의 관계도 개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삼국의 대왜관계는 삼국관계에 따라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7세기 중엽이 되면 신라의 대당외교 성공으로 당의 군사적 개입이 시작되자 왜 왕권도 선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신라․당에 가담하느냐 아니면 백제․고구려 편에 서느냐였다.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당은 왜 왕권이 파견한 견당사를 억류한 채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만다. 왜 왕권이 선택한 것은 백제였고 백제부흥을 위해 나당을 상대로 한 대규모의 출병을 단행하게 된다.
백제는 왕족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대왜외교를 펼쳤으며 지식인, 기술자를 비롯한 선진문물의 제공은 상상을 초월하였고, 그것은 곧 왜 왕권의 고대국가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양국의 친연성은 이러한 가운데 깊어져 갔던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도 대왜 외교를 추진했지만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왜국 내의 뿌리깊은 친백제적 성향들을 전환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멸망했지만 지배세력의 상당수는 망명하여 왜 조정을 비롯한 각지에서 진출하여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한반도계 163개 씨족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04개 씨족이 백제계라는 사실은 양국의 친연관계를 반영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고문헌에 기록된 수많은 한반도 제국의 관계 기록들은 끊임없이 전개된 고대 한일 외교사의 흔적들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