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百濟의 金石文 및 木簡 발견에 따른 새로운 硏究成果
III. 新羅 金石文의 발견과 六世紀史 연구의 劃期的 進展
IV. 新羅木簡의 발견에 따른 새로운 문제 提起
V. 맺음말
요약
1945년 이후 남한지역에서 발견된 금석문 및 목간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사, 신라사 연구가 진행되어 온 형황에 대해 간략하게 검토하였다.
백제 금석문 및 목간자료인 사택지적의 발원에 의해서 만들어진 堂塔碑의 斷片이 발견되어 백제사, 나아가서는 한일관계사 연구에 새로운 빛을 던지게 되었고,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 부여 능산리사지의 석제 사리감 역시 백제사 연구의 큰 성과이다. 한편 목간자료는 금석문과 달리 실용적 목적에서 기록되어 일차사료 중에서도 일등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은 백제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의 경우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청동호우, 충주 北郊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 등이 삼국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어준다. 이외에도 진흥왕순수비, 남산신성비,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리비, 단양 적성비 등을 통해 신라가 연맹왕국으로부터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해 가던 시기의 통치형태, 관등제의 성립과 지방 지배의 변화과정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기존의 7세기로 추정하였던 6부 성립이 524년 건립된 봉평리비에 신라육부라는 구절이 보임에 따라 잘못된 것임이 자명하고, 6부민을 대상으로 한 京位와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外位의 완성 시기 역시 6세기 후반으로부터 520년경으로 소급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라의 석비들이 율령비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면 목간은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용적인 목적에서 사용되었다. 경주 안압지에서 50여점의 목간이 나온 이래 월성 해자를 비롯한 도성내 여러 유적, 함안 성산산성등에서 목간자료가 발견되었다. 그 중 안압지 출토 목간은 통일시대의 정치사, 특히 경덕왕대 개혁정치에 있어서 洗宅과 같은 內廷 관계 官司의 중요성에 着目하게 된 것은 커다란 수확이다.
종전의 고대사 연구에서는 권력구조라든가 전쟁,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 등 거대담론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 일차사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사실을 통해 중요한 사실 및 현상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포착하게 되고 나아가 고대사의 실상에 육박하려는 연구방법론이 정착되어 가고 있다. 다만 미시사라고는 해도 역시 거대한 설명의 틀이 없이는 역사 해석이 불가능한 점을 상기할 때 종래의 거대담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미세한 분석과 이를 병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