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부흥운동’이라는 용어의 검토
Ⅲ.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Ⅳ. 부흥운동의 시대 구분
Ⅴ. 부흥운동 지도자들의 身元
Ⅵ. 부흥군의 조직과 무기 체계
Ⅶ. 부흥운동 중심 거점의 위치
Ⅷ. 맺음말
요약
‘백제부흥운동’에 관해 검토하였다. 먼저 ‘백제부흥운동’의 ‘부흥’이라는 개념이 백제 멸망 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항쟁과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있음을 밝혔다. 손진태가 이것을 ‘국조 회복운동’이라고 명명한 게 이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종전에는 당군의 난폭한 행위에서 찾았다. 그러나 백제 의자왕이 자신의 退陣과 친당정권 수립을 허락하는 차원에서 항복하였다. 백제 전국에서도 일제히 당군에 대한 항복 대열에 섰다. 그러나 신라측의 반대로 인해 당은 백제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단행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백제인들의 저항이 곧 부흥운동으로 확산된 것이다.
부흥운동은 1차와 2차로 나누었다. 1차는 무력항쟁기로서 660년 7월부터 663년 9월까지였다. 2차는 당과의 타협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모색한 시기로서, 웅진도독부가 통치하는 664년~672년까지로 설정하였다. 웅진도독부는 또 다른 차원의 백제부흥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부흥군 지도층의 계보에 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풍왕은 의자왕의 적자였기에 부흥군의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지만, 그를 둘러싼 상이한 계보가 보일 뿐 아니라, 정확하게 그것이 구명된 바도 없었다. 복신의 경우는 무왕의 조카로서 부흥군을 주도한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유인원기공비문>을 비롯해서 복신의 관등을 비롯한 경력을 놓고 볼 때 부흥군의 귀실복신과 왕족인 부여복신은 별개의 인물로 간주하는게 온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밖에 부흥군의 조직과 무기체계에 대한 기존 견해를 재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부흥운동의 중심축인 주류성 위치 구명의 관건이 되는 백강을 동진강으로 비정했던 이가 손진태였음을 확인하였다. 이와 관련해 백강과 주류성 위치에 관한 기존 설을 검토하면서 지금의 동진강과 부안 위금암산성이 타당함을 밝혔다. 끝으로 백제부흥운동 실패의 요인과 부흥운동이 지닌 역사적 의의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요망된다고 보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