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서론
二. 4세기 百濟의 국내적 상황 변화
三. 近肖古王代의 南方 征伐 과정
四. 百濟 주도의 대외교류체계 형성시도와 限界
五. 결론
요약
4세기 중국 5호16국이 대두하였고 백제는 정치적으로 중국세력과 대립하다 책계-분서왕이 연이어 죽게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신민의 추대로 비류왕의 정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직접 대립하였고 내부적으로 즉위를 지지하던 세력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왕권의 안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비류왕은 왕권 강화에 필요한 재지 기반을 남방 지역에서 찾으려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북중국이 유목민족에게 점령당하고 고구려에 의해 낙랑, 대방이 멸망당하여 동북아시아 기존의 교역 체계가 흔들린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백제는 근고초왕의 등장과 함께 왕권강화에 필요한 국가적 기반을 확충하고 대외적으로는 백제가 주도하는 중국⇔백제⇔마한·가라⇔왜의 새로운 정치·경제적 국제교역권을 형성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에 대한 대대적 정벌을 시도하게 된다.
369년 왜와 공동으로 신라를 공격하고 낙동강 유역의 비자발, 남가라, 안라, 탁국, 다라, 탁순, 가라를 평정한다. 서쪽으로 회군하여 남만 침미다례,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 등의 주변 소국들을 복속시킨다. 또 여기에 철을 비롯한 중요 물자의 수입과 동시에 한반도 서남해안에 대한 자유로운 동행 보장 등을 조건으로 남방 정벌에 참여한 왜를 백제 주도의 대외 교역권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여전한 고구려와의 첨예한 대립은 남방에 대한 백제의 통제력을 상당 부분 약화시켰고 일본서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아신왕 6년 전라도 일대 세력들이 일탈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후에도 정치, 군사적 면에서 독자적으로 대외교섭을 진행한 흔적들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 것을 통해 볼 때, 백제에게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인 압력과 통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일대의 가야 지역은 근구수왕시기까지도 백제가 군사력을 사용하는 등 효과적 통제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곧 신라의 반발을 불렀고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신라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을 끌어들이고 그 결과 백제는 5세기 낙동 일대의 교역 체계를 상당 부분 훼손당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