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성왕의 등장과 북방의 영역 상황
Ⅲ. 故土 回復 과정의 그 결과
Ⅳ. 결론
요약
백제는 성왕의 등장과 함께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는 혁신적인 조치까지 취하였다. 이는 성왕이 백제의 역사적 법통을 분명히 밝히는 작업을 시도하였음을 의미하는데 백제가 고조선에서 부여로 이어지는 대부여족의 법통을 잇고 있다는 시각을 대외적으로 강조하여 고구려에 대한 사상적인 우위까지도 확보하려 한 것을 뜻한다.
이러한 내적인 기반을 토대로 성왕은 패수, 오곡원, 우산성 등지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이에 대해 혈성, 왕봉·달을성, 독산성 등에서 반격을 받게 된다. 이는 성왕 초기 백제와 고구려가 예성강과 한강 사이에 유동적인 전선을 유지하며 대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힘이 여전하였고 따라서 백제 성왕으로서는 북방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좀더 많은 내부적 노력과 정비 그리고 힘의 축적이 필요하였으며, 외부적으로는 백제 단독이 아닌 주변 국가들과의 연합에 대한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었다.
여기에 마침 전개된 고구려 내부의 정란까지 이용하여 신라, 가야 연합군과 함께 북진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황해도 일대까지 진출하는 수복고지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성왕의 실지 회복 직후, 평양의 배후지로서 중요한 황해도 일대의 회복이 필요한 고구려와 인력과 물력의 실제적 공급이 가능한 한강 하류 유역의 매력에 사로잡힌 신라의 교섭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백제에 대한 신라의 일방적 동맹 파기와 한강 유역 점령으로 백제의 북방 영역은 성왕이 즉위하던 때보다 더 남쪽인 아산만 일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 자신이 죽는 등 참패하자 백제는 내부적으로도 더욱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