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된 원인에 관한 것으로 부흥운동군 지도층의 내분으로 인한 세력 약화가 첫 번째 원인이다. 661년 9월 왜국에 있던 고왕자 부 여풍이 귀국하자 백제유민들은 풍을 국왕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풍이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등 부흥운동군 지도층에 내분이 일어낫다. 도침이 살해된 후 풍왕과 복신은 부흥운동군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고 결국 663년 6월에 풍왕이 복신을 처형하였다. 복신의 처형으로 풍왕이 부흥운동군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지만 부흥운동군 지도자 중에는 사타상여와 흑치상지와 같이 풍왕에게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당군에 투항하는 자도 생겼다.
둘째는 고구려와 왜의 부흥운동군에 대한 지원이 실패로 돌아간 점이다. 고구려는 660년 11월에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였고 661년 5월에도 말갈군과 연합하여 신라의 우술성과 북한산성을 공격하는 등 백제부흥운동을 측면적으로나마 지원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당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지원을 하기가 어려웠다.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고구려의 직접적인 군사지원은 당군의 고구려 원정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663년에 가서야 한 차례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지원군은 손인사의 당군에게 중로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왜는 국력을 기울여 백제에 구원병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663년 8월에 벌어진 백강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백강구 전투에서 왜군이 패배한 원인은 왜군의 전투능력 부족에 있었다. 왜군의 전투력은 애초부터 정예병으로 구성된 나당군과 비교할 수 없이 열세였던 것이다.
셋째는 경제적인 기반의 상일이다. 부흥운동군은 백제 남부 평야지대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군량미 조달과 군수물자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왜에서 보낸 군수물자도 부흥운동군이 활발하게 활동할 조건이 되었다. 이는 나당군보다 우세한 전력을 보유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고 장기간 군사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런데 663년 2월 어려성과 거물성, 사평성 등 백제 남붕듸 곡창지대를 방어하는 주요 성들이 신라군에 함락당하고 동방성마저 함락되자 군량미와 군수물자 수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부흥운동군은 군수물자의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당군의 공세에 무너저 버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