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덕왕은 집권 초기에 주화파인 기로세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관산성 패전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의 권력기반을 재구축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펴나간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성왕의 유해 송환과 장례의식 준비, 성왕을 추복하기 위한 국가적인 대규모의 공덕분사 창건 등 성왕의 권위와 위업을 기리는 현창사업, 그리고 신라에 대한 군사대비책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집권 전반기에는 성왕의 추복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면 위더왕 14년 이후인 집권 후반기부터는 백제국가의 조립과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진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백제는 중국왕조인 진, 북제, 북주, 수를 대상으로 백제사상 가장 많은 대외교섭 횟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위덕왕 14년 기점으로 하여 백제는 중국 남북조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가졌고 위덕왕의 치세 중에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백제가 남조와 북제에 대한 견사가 함께 이루어지면서 삼국은 이제 남북조를 대상으로 활발한 등거리외교를 전개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575년 이후부터는 왜와 교섭을 재개하여 중국 남북조, 왜를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다변화하여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것이다. 이는 삼국간의 항쟁에서의 우위를 점하고 대내적 체제정비에 필요한 선진 문물 수용을 통해 왕권을 강화 안정시키려는 외교적 노력이었다.
백제 위덕왕대 수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여전히 중국 정세에 따라 간헐적인 교섭을 벌리고 있어 아직 전형적 조공외교의 기틀이 마련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정세에 적극적이고 민첩하게 대처하고 있는 점이 남북조시대와는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 교섭 목적도 남북조와 같이 거의 교빙 차원의 교섭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수의 고구려 정벌시에는 향도가 되기를 청할 정도로 삼국 항쟁을 대중외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면에서 위덕왕대의 대중교섭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북제는 566년부터 북제와 교섭을 잠정 중단한 고구려, 신라에 대한 대응조치로 백제 위덕왕에게 동청주자사 관작을 수여하였다. 회수 이북 청주지역이 북제 영역임은 틀림없지만 남북조간 영역 변화 여하에 따라 청주 행정구역이 변동이 있다는 점에서 동청주는 실재성 없는 작호로 청주 동쪽의 백제를 지칭한 관념적 표현으로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