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Ⅰ. 唐의 군사개입과 義慈王 정권의 몰락
Ⅱ. 백제인의 부흥운동과 唐의 백제지역 통치정책
Ⅲ. 義慈王 및 百濟 멸망 관련 기사의 분석
Ⅳ. 義慈王과 百濟 멸망에 대한 평가 문제
결어
요약
의자왕의 내치는 신라로부터 강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성공하였으나 외치에서는 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고집한 그의 자주적 노력이 국제관계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백제의 멸망을 불러오게 되었다. 의자왕 관련 사료 분석을 통해 당이라는 외부세력의 개입, 이로인한 심각한 국력의 위축이 신라의 적극적 공세라는 외적요인에 더해지며 백제 멸망의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의자왕의 대내적 통치능력은 인정받을 만 하나 수시로 변화하는 국제관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성충의 건의를 듣지 않은 의자왕 스스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은 중국과 외교문제에 뛰어난 식견을 가진 성충의 충언을 듣지 않고 배척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오아 자신의 뼈아픈 고백인 것이다.
의자왕은 신라와 원한을 풀라는 당 천자의 권유를 따르지 않았고 당의 입장에서는 국제적 문제아로 비쳐 현존 사료에 보이는 바와 같이 행동이 도리에 어긋났다든지 대국에 죄를 지어 패망한 것이 당연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백제 입장에서 의자왕이 신라에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은 백제와 신라 사이의 영토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양보할 수 없는 첨예한 사안이었기에 각축전이 그만큼 신하였고 중국이 양국 문제에 개입하여 신라에 유리한 조건을 강요함에 따라 의자왕은 중국과 등지고 신라에 강경책을 밀고 나간 것이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이런 모든 책임과 원망을 중국 쪽으로 돌릴 수도 있는 일이다. 이외에도 위정자가 정치를 돌보지 않아 농민경제가 파탄에 빠져 생활고로 유민화 현상, 반란 등을 보여주는 직접적 기록이 없고 계백의 전사,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등은 민심이 백제와 의자왕편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멸망은 내부적 문제보다 국제관계의 변화라는 새로운 시대상황 속에서 중국의 다이라는 외부세력의 개입 및 이를 적절히 활용한 신라의 백제에 대한 군사공격으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