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부흥운동’ 개념의 검토
2. ‘부흥운동’과 관련한 熊津都督府의 성격
3. 熊津都督府의 존속 기간
4. 祖國 回復軍 지도자들의 身元 문제
맺음말
요약
백제 멸망 직후에 국가를 되찾기 위한 백제인들의 항쟁을 지금까지 부흥운동이라고 일컬었다. 기존의 부흥운동이란 용어는 재건이나 복구의 개념으로 부흥의 사전적 의미와 부합하지 않는다. 당나라와 신라가 강점한 자국 영토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려는 일종의 독립투쟁이기 때문이다. ‘운동’이란 용어는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이해가 되지만 일제하의 ‘신간회운동’, ‘물산장려 운동’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비폭력적인 인상을 준다. 따라서 조국회복전쟁으로 명명하는게 그 성격에 부합된다고 생각된다.
백제 조국회복전쟁은 663년 9월 백강전쟁을 고비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부흥운동을 1차로 웅진도독부에 의한 통치기간을 2차로 규정하여 조국회복전쟁의 일환으로 그 기간에 웅진도독부를 포함시켰다. 웅진도독부의 존속기간은 종전의 671년이 아니라 672년이다. 그리고 조국회복전쟁을 이끌었던 지도자 가운데 풍왕과 복신, 특히 복신의 신원에 관해 재검토해보았다. 유인원기공비문에 보이는 가짜 승려 도침과 가짜 귀실복신이 이름을 빌리고 벼슬을 훔쳐 모두 장군이라 칭하였다는 이 기록은 회복전쟁군의 지도부를 폄하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나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것과 관련해 일말의 사실성이 없는지 타진해 볼 필요가 있으나 이에 무왕조카인 부여복신과는 다른 인물로 파악하는 게 옳다. 특히 627년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지만 34년이란 장구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3등 은솔, 5등 한솔로 기록된 것을 볼 때, 무왕의 조카라면 복신은 더 높은 관등을 소지해야 마땅하다. 왕족으로서의 권위와 명성 때문에 귀실복신이 부여복신을 가명한 것으로 보인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