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비천도는 동성왕대부터 추진되었고 그 후반경 사비 나성의 축조가 완료되는 등 천도를 위한 제반 여건이 모두 완비되었던 것으로 간주해왔다. 동성왕의 피살은 사비천도를 반대하는 웅진 지역 토착세력의 저항의 산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부족하며 오히려 사비 천도는 25대 무녕왕 후반기부터 추지된 것으로 규명하였다.
무녕왕은 동성왕대 이루어진 지방에 대한 지배와 왕권 강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 증대에 비상하게 심혈을 기울였고 실제 다대한 성과를 기록했던 것 같다. “민심이 귀부했다”고 했을 정도로 무녕왕의 치세는 볼만한 것이 있었다. 또 무녕왕대는 왕권과 귀족권 간의 갈등도 조정 국면에 접어 들었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왕권의 안정이 이루어졌다. 무녕왕은 중국 양의 문물을 활발하게 받아들였고 그것을 왜에 전파했을 정도로 문치의 시대를 역동적으로 열었던 것이다. 아울러 백제는 숙적인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방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대고구려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백제는 섬진강 유역에 진출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무녕왕대 후반기에 사비 천도가 추진되었던 것 같다. 사비 천도 목적은 국가의 중심축이 남쪽으로 내려옴에 따라 호남평야의 농업생산력을 장악하기에 유리하였다. 사비라는 도시 자체가 그 주변에 거대한 농경지를 끼고 있는 등 무녕왕대 이래로 추진해 온 농업생산력 증진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비는 웅진보다 서해와 가까운 금강 하류에 소재한만큼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까지 한층 긴밀해지는 상항에서 활발한 접촉이 가능한 입지적 조건을 갖췄다. 또한 조운로를 단축시켜 경제적 효용성 문제와 더불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하는 측면도 고려했던 것 같다.
웅진 지역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토착세력들로부터 탈피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과 유교의 예치와 불교에 의한 이상국가를 한꺼번에 구현할 수 있는 공간적 조건을 지녔기 때문이다. 22부의 명칭과 숱하게 조성된 사찰의 존재는 그러한 이상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사비천도에 적극적인 사씨의 근거지는 사택지적비에 적혀있는 내지성 즉, 유성지역으로 간주하는게 온당하다. 천도 이전 사비는 도시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고 유성지역에 근거지를 형성한 사씨 영향권 내에 부여 지역이 소재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배경속에서 사비천도가 추진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