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는 산악신앙이 존재하였고 천도 이후 국가적 치제의 대상이 되는 산악들이 사비성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국토의 4방계에 소재한 토착세력의 신앙처이기도 한 산악 가운데 국가 차원에 의미있는 지역의 산악을 지목하여 5악을 설정, 국가보호령으로 삼았던 것이다. 5악은 백제의 중앙과 지방조직인 5부 5항 및 5방과도 상응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를테면 산라와 접경지에 위치한 동악인 계룡산은 국도의 운명과 직결된 신라의 침공을 방어하는 산악이었다. 서악인 월종악은 당시 백제의 현안이기도 한 구마한세력을 제압하여 이 세력을 재흡수하는 목적을 지닌 치제 대상이었다. 남악인 지리산은 사비초기 다시금 백제가 종주국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 가야연맹에 대한 진출 및 그 세력 위무라는 임무를 짊어진다. 북악은 오서악은 고구려 공격 방어의 임무와 한수유역의 실지회복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짊어졌다. 중악은 명확하게 소재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국가적 치제 대상이며 국토보호령으로 인식된 4방계산에 짝하여 호국사찰이 창건되었다. 이를테면 오합사는 북악과 짝하여 북악 오합사로 기록에 보이는데 이는 곧 국토보호령인 기존 4방계산의 역할을 사찰이 떠맡은 것으로 생각된다. 안이면 산악신앙과 불교적 사방수호관념이 병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왕대에 칠악이 있던 칠악사에서 기우제가 거행된 저을 생각할 때 외려 산악신앙이 짊어졌던 역할을 사찰이 대신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한성기 횡악의 경우 기우는 산악신앙과 관련된 것인데 그것까지 사찰이 맡기 때문이다. 한편 법왕은 사비천도 직후 서정되었으리라 짐작되는 왕도 주변의 그 수호산악읹 3산 가운데 부산과 짝하여 왕흥사를 창건하고 있다.
불교관념 깊숙한 사회 저변 침투를 통해 왕권의 기반을 확대하려고 한 법왕은 보수적 유제이며 국가적 제의였던 산악신앙의 소임까지 불교신앙으로 대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귀족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였고 이를 둘러싼 왕권과 귀족권 간의 갈등이 법완 단명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요컨대 법왕은 정비된 불교교단을 통해 얻어진 정리된 불교이념을 구체적으로 사회 각 방면에 침투시켜 그것을 주재하는 왕의 지위를 불의 지위로까지 끌어올려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