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대로 집약되는 한성말기 백제왕권의 존재형태는 개로왕을 정점으로 한 왕족 중심의 지배체제였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배 세력간의 갈등 소지는 여전히 있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으나 국력의 소모와 민심의 이반을 가져와 한성 함락의 주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대외관계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전제왕권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평양천도 이후 귀족세력의 반발과 이탈이 가중되자 왕권 안정을 위해 한성을 공략하였다.
결국 백제는 대내외적 상황으로 한수유역을 상실하고 개로왕대 구축된 왕족 중심 지배체제의 전면적 붕괴로 왕권이 급격히 약화된 반면 귀족세력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웅진초기 왕위계승의 거듭된 방계 이행은 귀족권의 영향력이 미친 것이며 삼근왕, 동성왕 즉위과정에 절정을 달했다. 그러나 무령왕은 독자적 세력기반을 확보한 후 즉위하여 강화된 왕권을 구축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귀족세력의 개입을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웅진초기 방계에 의한 왕위계승은 중앙 정정의 거듭된 혼미는 백제 세력권 내의 가야연맹의 이탈과 지방세력의 분립화경향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동성왕 즉위를 계기로 신구 세력의 조정에 바탕을 둔 대내적 왕권의 안정을 이루었다. 이에 이탈이 가장 시한 전라도 방면의 지방 세력에 대한 재흡수를 시도하였고 재지세력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재지 세력을 왕권 질서체계내로 완전히 편제시켰다.
동성왕대 지방 세력의 활발한 중앙 진출과 흡수는 나성 축조와 더불어 왕도 편제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전국토에 오부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중앙 귀족에 대한 편제 계획은 왕 자신의 피살을 가져오는 한계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성왕대 왕권 전제화의 꾸준한 노력은 무령왕대의 중흥의 기반이 되었고 이는 성왕대의 사비천도와 북정 단행의 기반이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