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 목간은 출토 상태의 양호함과 함께 판독된 문자의 내용으로 보아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목간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목간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용도에 대한 해명은 분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목간이 어떠한 용도로 제작되었으며, 또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 배경과 목간문화 속에서 위치하는가를 추구한 결과물이다.
먼저 목간의 용도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는 목간 자체의 정보에 접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형태와 判讀, 書式의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해 궁남지목간은 문서목간에 속하는 帳簿목간이며 나아가 하나의 목간이 완결된 정보와 기능을 지녔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丁과 歸人(部夷)의 관계를 목간 앞ㆍ뒷면의 표리관계에 주목하여 정은 서부후항의 일반민들이며, 귀인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사람들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문헌에 등장하는 萬盧國, 邁盧ㆍ邁羅(王), 邁羅縣의 지명이 목간의 邁羅城과 같은 지역이라는 판단 하에 지명 연구들을 참고하여 전북 옥구(군산)지역으로 비정하였다. 서부후항의 丁과 외래계인 歸人은 非血緣的 관계이며, 이들은 매라성의 水田 5形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관계를 유추하는 데 많은 시사를 주는 자료가 武寧王 10년(510)의 游食者 歸農과 義慈王 2년(642)의 大耶城民 徙民 기사이다. 游食者는 안정적인 재생산기반을 갖추지 못하여 농업생산구조에서 이탈한 계층을 의미하고 歸農은 곧 국가에 의한 徙民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歸農(徙民)정책은 유식자들에게 최소한의 재생산기반을 제공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토지의 지급을 자연스럽게 상정할 수 있다. 전쟁포로를 나라 서쪽의 州縣으로 分居(徙民)시켰다는 것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례를 통하여 백제가 인민을 토지에 결합시키기 위한 사민정책을 시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료상의 大耶城民은 목간의 歸人에 견줄 만하고 游食者는 2명의 丁에 대응시킬 수 있을 듯하다. 귀인의 유형에 전쟁포로는 충분히 해당될 수 있으며, 목간의 丁도 비록 서부후항에 거주하지만 성인남자 2명으로 나열된 것에서 유식자의 처지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徙民의 實例는 궁남지목간의 내용에 근거한 용도를 생각할 때 연관성이 많다. 西部後巷의 丁을 중심으로 형성된 8인은 邁羅城으로 徙民되어 水田 5形을 지급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목간에 등장하는 丁과 歸人(部夷)들은 토지 소유나 노동력의 확보 등 안정적인 재생산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여겨지므로 徙民(歸農)이 행해지면서 국가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編戶되어 給田이 이루어졌다. 궁남지목간의 용도는 바로 徙民과 給田의 과정에서 사용된 ‘徙民給田籍’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