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고구려와 백제의 都城
Ⅲ. 신라의 王京과 변천
Ⅳ. 삼국과 통일신라의 지방도시
Ⅴ. 맺음말
요약
한국 고대의 왕경과 도성, 별도 및 소경에 관한 연구 성과를 도시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하였다. 삼국시대에 왕경과 도성은 지배층이 집주하던 공간이었고, 신라에서는 경위와 외위의 이원적인 관등제 운영을 통하여 왕경인과 지방민을 정치적․신분적으로 차별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역시 제도적으로 왕경인과 지방민을 차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지방에서 거둔 수취물이 왕경과 도성에 집중되면서 상품을 매매하는 시장이 개설되고 도시적인 면모를 갖추긴 하였지만,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삼국의 왕경이나 도성의 도시화는 제한을 받았던 것이다. 신라처럼 왕경 6부인을 遷徙시켜 인위적으로 설치한 소경 등의 지방도시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외위가 폐지되면서 왕경인과 지방민을 정치․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관행이 사라졌다. 그 대신에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왕경을 재편하여 인구의 유입을 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정부의 정책은 하대에 이르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건설된 시가지가 무질서해지면서 지방민의 왕경으로의 유입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왕경의 영역이 주변으로 확장되는, 이른바 도시스포롤현상이 나타났다. 통일 후에 왕경으로 더 많은 물자가 집중되면서 상업이 활성화되었고, 그 결과 남시와 서시가 더 개설되었다. 통일 이후에 국가 또는 진골귀족이 경영하는 공방을 북천 이북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도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9세기 헌강왕대에 인구가 17만 9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비농업인구가 차지하였을 것이다. 신라 하대에 왕경에 대규모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상업과 공업도 한층 더 발전하였고, 그 결과 왕경의 인구 가운데 비농업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정형적인 도시로 탈바꿈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방의 행정중심지인 9주의 州治나 小京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러나 물자나 인구의 유입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도시화의 진전에 한계가 있었다.
근래에 백제의 도읍인 부여와 공주,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그리고 별도와 소경, 주치지역의 고고학 발굴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현재 한국 고대의 왕경과 도성에 대한 이해가 크게 진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향후 도시사적인 관점에서 고대 도성 및 소경을 비롯한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가 더욱 더 진전되려면, 왕궁과 시장의 위치, 가로구획의 편제 원리, 인구 수 및 신분에 따른 왕경인(도성민)의 거주 문제, 인구 밀집 현상에 따라 파생되는 여러 가지 도시문제, 그리고 도성 또는 지방도시 사이의 상호 관계 등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