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건국자인 온조는 天系인 해모수, 용왕의 딸인 하백녀(유화)의 신화적인 요소와, 알에서 태어난 주몽의 탄생과 같은 난생설화가 없이, 처음부터 주몽-서소노-우태라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인물들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백제에는 부여나 고구려 다운 건국신화나 시조신화가 없다. 이는 백제가 어버이 나라인 고구려에 항상 열등의식을 지녀온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온조왕 원년에 東明王廟를 세운 것이나, 백제 13대 근초고왕(346-375년)대인 371년에 평양을 처들어가 고구려 16대 고국원왕(331-371년)을 사살하지만 평양을 백제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한성으로 되돌아오는 점 등에서 이해된다. 그래서 백제의 왕실은 고구려왕실에 대한 열등감의 극복과 아울러 왕실의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것이 전설적인 신화보다는 龍이 왕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왕권의 탄생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인 것 같다. 《삼국유사》권 2 武王조에 의하면 무왕(璋)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南池에 가서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그 못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을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무왕때에 비로소 용이 등장하고 무왕이 용의 아들임을 언급하고 있다. 기록에는 무왕때 처음 신화적인 요소가 보인다. 李御寧씨의 이야기대로 중국과 한국에서 용은 물(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농경사회를 상징하는 왕이다. 최근 부여 능산리에서 발견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뚜껑과 몸체에 표현된 도교와 불교적 문양과 용봉(또는 주작과 현무), 연화문 가운데의 太子상의 장식 등이 그러한 증거로 보여 진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향로의 제작연대가 무왕 때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것은 후일 신화가 없어도 될 것 같은 고려나 조선시대에 《帝王韻紀》(李承休저)나 《龍飛御天歌》를 만들어 건국의 정신적, 이념적 틀을 꾸준히 보완해 나가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