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白村江 싸움에로의 道程
3. 백제-왜 연합군 결성상의 몇 가지 문제
4. 맺음말
요약
본고는 백제와 왜국의 우호관계의 총결산인 백촌강 싸움에 왜국이 참전하게 된 의도, 풍장의 책립 문제 등 몇 가지 제문제를 중심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나당연합군과 백·왜연합군 양쪽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는 663년 8월 백촌강 싸움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결과는 백제의 사실상 소멸과 왜군의 패퇴였다. 백촌강 전투 참전 문제를 둘러싼 최대 쟁점은 왜 왜군이 참여하였는가이다. 종래 조국해방설, 조국구원설, 내부 모순과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이보다는 왜국이 느낀 현실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를 집중 공격하던 당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자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그 다음은 일본이 직접 당의 공격 목표로 노출되었고 고구려 멸망 가능성도 한층 높아져 한반도에서의 당의 패권이 확립되며 이는 곧 왜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극도로 고조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왜국의 지배층은 백제 구원을 서둘러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일본 열도에 대한 당의 위협을 사전에 저지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풍장의 귀국 시기는 661년, 662년이라는 두 가지 이전이 있다. 그러나 천지기 원년 5월조는 후대에 편집된 사료이며 필자는 제명 7년 8월조를 통해 그전에 풍장이 귀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풍장의 즉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풍장은 백제 유민 세력의 백제왕 옹립 의사가 전제되었으며 유민세력이 왜국 조정에 요처안 것은 그의 귀국자체이지 백제왕으로 책립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또 풍장 호송 기사에서 귀국시 그는 여전히 백제왕자로 표기된 점에서 귀국 후에 곧 백제왕으로 즉위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멸망 이전, 이미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 전선은 형성되어 있었고 백제 멸망 직후 그 해 10월 고구려의 신라 칠중성 침입은 백제부흥군과의 긴밀한 연대 하에 나온 작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독자적 판단에 의한 백제 멸망에 대한 고구려의 보복으로 보인다. 천지기 2년 5월조 백제부흥군과 고구려의 접촉이 확인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군사적 협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백제부흥군과 왜연합군이 고구려군과 연합하여 양동작전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