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의 '樂浪' 관련 기사 검토
Ⅲ. 백제와 중국 군현 사이의 관계의 추이
Ⅳ. 맺음말
요약
백제와 중국 군현 사이의 관계의 추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본고의 논의 결과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첫째, 『삼국사기』백제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樂浪’관련 기사들은 실제의 중국 군현 낙랑군과의 관계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 기사들을 통해 백제 초기의 대중국관계의 실상을 추적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 그렇지만 백제는 한반도 서북부의 중국 군현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므로, 사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양자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행해졌을 것은 분명하며, 특히 3세기 중엽 이후 백제가 마한의 주도 세력이 되면서부터 대방군이나 요동의 동이교위부를 통해 중국 세력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을 것이라는 것, 셋째, 4세기 초의 낙랑․대방군의 소멸이 일시적으로는 백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겠지만, 다수의 낙랑․대방계 유민이 백제사회로 남하함으로써 오히려 중국의 선진 문물을 더욱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곧 백제의 흥성을 갖고 온 요인이 되었다는 것, 넷째, 4세기 후반 백제는 낙랑․대방 고지의 회복에 나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를 바탕으로 중국의 동진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백제왕이 동진의 ‘낙랑태수’라는 직함을 부여받음으로 인해 중국 문물의 수입에 더욱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 다섯째, 그러나 동진의 요청을 받고 이루어진 백제군의 요서 지역 출병이 실패로 끝나면서 더 이상 백제로서는 ‘낙랑’이라고 하는 중국적 색채의 직함이 의미가 없게 되었고, 이것이 곧 백제와 낙랑 사이의 역사적 관련이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 등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