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의 국가형성 시기 논쟁
Ⅲ. 백제국의 성장
Ⅳ. ‘二子’群의 즉위
Ⅴ. 古爾王系의 정치적 위상
Ⅵ. 맺음말
요약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둘째 아들[二子]’이라는 말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政變 곧 무력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물을 시사적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古爾王․比流王․近肖古王이 이에 해당하며, ‘仲子’라 하여 조금 다르게 표현된 辰斯王은 같으면서도 다른 부류에 속한다. ‘둘째 아들’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고이왕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그는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서 초고왕-구수왕-사반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고이왕-책계왕-분서왕, 그리고 계왕까지 그의 家系가 당분간 왕위를 독점한 다음 다시 초고왕계로 왕위를 물려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直系인 초고왕계와 傍系인 고이왕계가 3․4대를 연이어가며 순차적으로 즉위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백제의 왕실계보가 인위적으로 조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초고왕계와 고이왕계의 불합리한 家系圖는 초고왕계의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인접 세력인 고이왕계를 흡수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고이왕계의 근거지는 대략 경기도 북부의 서해안 일대로 추정되는데,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는 임진강유역이 가장 유력하다. 『三國志』 韓傳에서 그에 해당하는 집단을 찾아보면 臣濆沽國 혹은 優休牟涿國에 비정될 개연성이 있다. 고이왕계가 백제국에 흡수된 시점은 우선 비류왕 내지 근초고왕이 재위하던 무렵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고이왕계인 계왕을 억지로 비류왕과 근초고왕대까지 상당한 정치력을 한동안 유지하였던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비류왕과 근초고왕의 관계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다만, 백제의 왕실묘역으로 추정되는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일대에서 積石塚이 조영된 시기가 대략 4세기 이후이며, 그 이전은 土壙墓와 土築墓계열의 무덤들이 주로 조영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는 墳墓文化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지배층 문화의 변동을 시사하기에 王室交代論을 적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따라서 향후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백제의 왕실계보를 再論하고 싶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