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여창(위덕왕)의 대외 전쟁 주도와 실패
1) 백제의 북진과 여창의 활동
2) 관산성 전투의 주도와 실패
III. 위덕왕의 왕의 계승과 정국 상황
IV. 위덕왕대의 대신라 전투 과정과 결과
V. 맺음말
요약
百濟는 管山城 전투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하였다. 당시 정벌을 주도하였던 왕자 餘昌(위덕왕)은 신라군의 포위망에서 간신히 도망해 나오는가 하면, 신라는 백제의 멸망을 이야기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결과 백제는 북으로는 牙山灣 以南, 동으로는 國原城(충주), 三年山郡(보은), 甘文州(개령) 以西로 영역이 축소되고 말았다.
한편, 왕자 餘昌은 신라 정벌에 대한 책임 때문에 한동안 王位에도 오르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 속에 있었다. 간신히 귀족 세력과의 타협으로 왕위에 오르게 됐지만, 정국 운영은 귀족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대가야와의 동맹을 모색하다가 실패함으로써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威德王은 中國·倭 등과 교류를 추진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상화하고, 聖王을 위한 능산리 사원을 완공하는 등 즉위 초의 정치적 제약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왕권의 기반을 다지려 노력한다. 그리고 다시 신라의 秋風嶺路를 차단하여 경기도 지역과 충청 남부 및 경상도 일대가 신라 중심부와 분리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군사 행동을 감행하는데, 이 마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따라 威德王은 다시 대외적인 전쟁 보다는 외교적으로 국제적 지위를 확인하여 권위를 회복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朝貢 교역을 통한 物力 확보에 주력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위덕왕 관련 기사들이 대부분 대외 교류로 채워져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이와 관련이 있으며, 위덕왕 26년 이후 45년까지는 이러한 내부적 蘊蓄을 통해 결국 武王代의 대외 팽창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