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관련 사료의 정리
1. 주서와 수서의 기록
2. 통전과 당회요의 기록
III. 관련 사료의 검토
1. 구태의 출계
2. 대방고지
3. 시국과 흥기
IV. 맺음말
요약
唐初부터 北宋代까지 중국문헌에 보이는 仇台의 百濟建國記事를 종합하고, 이를 통하여 백제 건국상의 논점을 재검토한 것이다. 첫째, 仇台관련 기록은 636년 편찬된 周書와 隋書에 처음 보이고, 이에 기초한 내용이 明淸代까지 지속된다. 南宋이후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없으나, 北宋代까지의 사료에는 百濟의 所傳이 반영된 내용이 나타난다. 둘째, 구태관련 사료는 唐初에 편찬된 ①기의 자료와 9세기 이후 ②기 사료 사이에는 차이가 나타난다. ①기는 6세기 후반이나 7세기 초에 수집된 자료에 기초하여 있으며, ②기의 기록은 7세기 후반 백제멸망기와 그 이후의 傳聞을 자료로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①기, ②기의 차이와 별도로 백제를 건국한 구태의 계보는 일괄된 갈래가 있다. 곧 부여계로 보는 周書-通典계열과, 고구려로 인식하는 隋書-唐會要 계열로 구분된다. 특히 수서-당회요의 건국 전승은 삼국사기 온조전승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넷째, 구태가 백제를 세웠다는 帶方故地는 당시의 백제 영역을 의미할 뿐 公孫氏가 세우고 魏晋代에 지속된 帶方郡이나, 그 이전 樂浪郡 帶方縣과는 무관한 존재로 여겨진다. 六朝이래 백제는 옛 馬韓의 땅에 자리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帶方故地는 이미 지적된 대로 6세기 후반 北齊아래 唐代까지 백제를 帶方, 신라를 樂浪, 고구려를 遼東으로 이해하던 인식에 따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다섯째, 구태가 백제를 건국한 시기는 公孫度와의 결혼 기사로 미루어 後漢末로 여겨진다. 구태와 공손도의 女와의 결혼에 대하여는 三國志에 부여왕 위구태의 결혼 기사를 잘못 옮긴 때문이라고 보아왔다. 그러나 검토 결과 위구태가 백제를 건국했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오히려 수서와 통전의 찬자는 위구태로 표현할 경우 모순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단정하기 어렵지만 후한말에도 공손도 시기에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인식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여섯째, 구태 기록에는 건국 이후 東夷强國이 되었고 이후 馬韓의 諸小國을 병합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기록은 본래 梁書 百濟傳에 마한의 일원이던 백제가 ‘後漸彊大 兼諸小國’했다는 기록이 수서와 통전의 仇台기록에 포함된 것이다. 대부분의 馬韓倂呑은 遼西 置郡을 전후하여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시기를 명시한 ‘自晋以後’는 실제 東晋이후로 생각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