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관세음응험기』의 천도 관련 기사에 대한 검토
3. 익산 왕도 가능성의 검토
4. 익산 천도와 사비성 환도 배경
5. 익산 천도 반대론의 문제점
6. 맺음말
요약
백제 武王代 益山 遷都說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무왕은 즉위 초기에 자신의 근거지였던 익산으로 천도하였으나 630년 7월~631년 사이에 사비성으로 遷都했음을 밝혔다. 익산이 백제 王都였음은 적지 않은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大東地志』에 보면 익산을 무왕대 別都라고 하였다. 別都는 行宮의 의미가 아니라 首都의 기능을 보완해주는 都會를 가리킨다. 익산은 당초부터 副都의 성격을 띠고 있는 別都는 아니었다. 익산은 고구려 國內城과 마찬가지로 前 王都였기에 別都로 기록에 남게 되었다. 그러한 익산은 사비성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開國地로 인식되었다. 이 역시 익산이 王都였던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왕궁 유적으로 추정되는 왕궁평성에서 출토된 ‘首府’‘銘 기와라고 하겠다. ’首府‘는 ’首都‘를 가리키는 문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검토했던 이러한 결론은 『觀世音應驗記』에 보이는 무왕대의 익산 천도 기사와 모순 없이 너무나도 잘 부합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관세음응험기』의 신빙성이 확인되어졌다. 가령 『관세음응험기』의 ’武廣王‘은 무왕의 시호로서 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반면 여타 문헌에 적혀 있는 ’武康王‘은 잘못된 표기로 밝혀졌다. 그리고 『관세음응험기』에 기재된 帝釋精舍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 木塔에 부장되었던 사리병과 파야경의 존재가 현재 확인되고 있어 그 기록의 신빙성을 더 해주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大王‘표기를 비롯해서 왕궁평성오층탑에 부장되었던 金剛經의 무왕대 제작설까지 제기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관세음응험기』의 사료적 가치를 확고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 밖에 왕궁으로 비정되어 왔던 왕궁평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비중은 물론이고, 王都의 구획을 가리키는 5部名이 새겨진 印刻瓦의 존재 역시 그것을 시사해 준다. 요컨대 이 정도의 풍부한 문헌과 고고학적 물증은 익산 王都說을 감연히 부정할 수 없게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