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의자왕의 모계 문제 -취리산 맹문의 해석
3. 『일본서기』 황극 원년 조 정변 기사의 검토
4. 태자 책봉 문제와 관련한 정치적 추이
5. 맺음말 -의자왕 15년 이후의 왕권에 대한 해석과 결부지어
요약
백제 의지왕대의 정변기사를 통하여 얻어진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여융과 문무왕 간에 취리산에서 체결한 盟文에 보이는 “親姻과도 不睦하였다”는 문구는 《일본서기》642년(皇極 원년)조에 기록된 정변을 가리키는게 아닌 것으로 밝혔다. 여기서 親姻은 인척관계를 맺은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와 관련된 ‘百濟 先王’은 의자왕이 아닌 무왕임을 새롭게 입증했다. 둘째, 의자왕은 즉위 초에 정변을 통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입론의 근거가 되었던 황극 원년조의 기사는, <사택지적비문>과 같은 금석문 자료와 결부지어 검토하면서 전후 상황을 살펴볼 때, 錯亂이 일어난 것으로 다시금 확인되었다. 錯亂의 원인은 황극과 제명은 동일인물이지만 復辟으로 인한 혼동으로 기사가 잘못 배치된 것이었다. 셋째, 의자왕의 정변은 재위 15년(655)에 단행된 것이 되는데, 이는 의자왕대의 정치사가 그 15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종전의 지적과도 잘 연결된다. 그러나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은 기존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는 왕권의 약화나 후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의자왕 15년의 정변은 지배 세력의 교체와 더불어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켰음을 뜻한다. 넷째, 의자왕 재위 전반은 그가 해동증자로 일컬어질 정도로 귀족권과의 마찰이 없었던 타협의 시기였다. 의자왕이 재위 중반이나 후반도 아니고 즉위와 더불어 정변을 단행한 결과 왕족들에 대한 숙청과 같이 손에 피를 묻히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면 형제간의 우애와 孝行의 대명사로 云謂되는 해동증자나 해동민자라는 명성을 과연 얻을 수 있었을까? 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도 없는 문제라고 본다. 반면 그 후반은 국왕을 축으로 하는 일대 세력 재편성기였으므로, 왕권과 귀족권과의 첨예한 갈등이 표출되었으나 의자왕은 왕권 강화에 반발하는 귀족 세력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그러므로 의자왕 15년 이후에 왕권이 약화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다섯째, 의자왕대에 太子位는 隆에서 孝로 교체되었는데, 孝의 어머니는 思古로 간주하는게 옳다고 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