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동성왕의 탄생과 성장
III. 동성왕의 즉위 배경
IV. 동성왕의 즉위와 정국 변화
V. 맺음말
요약
아신왕 6년(397)에 태자 腆支가 바다를 건너가 倭 왕실의 八須와 혼인함으로써 백제와 倭는 바야흐로 和親에 입각한 혈맹관계로 들어갔다. 蓋鹵王 7년(461)에도 왕의 아우이자 백제의 군사지휘권을 지닌 昆支가 바다를 건너가 혼인하였다. 그는 이미 백제에서 혼인하여 임신한 아내까지 둔 상태였다. 腆支와 昆支의 渡倭 및 婚姻은 공통점을 지닌다. 두 사람 모두 백제의 제2인자였으며, 倭로 건너갈 무렵 백제는 고구려에게 군사적으로 몹시 시달렸다. 이를 통해 우리는 腆支와 昆支의 渡倭 목적이 倭의 군사적 지원을 최대화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479년에 이루어진 東城王의 즉위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려는 백제 지배층의 苦肉之策이었다. 동성왕은 나이가 어린 데다 倭國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백제의 왕위계승자로는 부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백제의 유일한 혈맹인 倭國을 백제가 처한 상황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백제의 지배층은 政派를 초월하여 東城王을 옹립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물론 폭넓고 안정적인 교류체계를 원하던 倭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도 한몫 하였을 것이다. 동성왕을 옹립하고 보좌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木滿致[木滿致]로 대표되는 木氏와 眞老·姐瑾[祖彌桀取]를 비롯한 眞氏였다. 특히, 木滿致는 동성왕이 즉위한 뒤 渡倭하여 예전에 昆支가 했던 것처럼 河內를 중심으로 백제계 이주민을 관리하며 백제 왕실을 후원하였다. 동성왕은 外交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新羅와 和親을 맺고 南齊에 官爵을 요청하였으며, 그런 과정에서 泗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외교의 실질적 성과가 미미하자 신료들이 점차 실망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동성왕이 암살되고 그의 배다른 형인 무령왕이 즉위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동성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지배층이 외부의 힘을 빌어 안정을 취하려 했기 때문이며, 그의 죽음은 그러한 노력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의미한다. (필자 요약)